20131025 스페인/나가사키전
이번 전시는 [2013년도 문화청 지역과 함께 일하는 미술관, 역사박물관 활동지원사업]에 채택된[나가사키현 미술관과 부산시립미술관을 중심으로 한 한일문화교류사업]의 일환으로 실시되었다.
스페인 / 나가사키
나가사키현 미술관은 [스페인 미술]과 [나가사키 연고작가 작품]을 중심으로 현재 약 6000여점 (스페인 미술 1500점, 나가사키 연고작가 작품 4500점)의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다.
스페인 미술의 컬렉션은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특명전권공사로 스페인에 부임한 스마 야키치로(1892~1970)의 [스마 컬렉션]을 바탕으로 15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 약 500년간 제작된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스페인 국외에서 스페인 미술의 흐름을 개괄할 수 있는 컬렉션으로 유명하다.
나가사키와 스페인의 관계는 나바라왕국(현 스페인 나바라주)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코 자비에르(1506~1552)가 히라도를 방문한 대항해시대 1550년 부터이다. 그러나 16세기 말부터 심해진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에도막부로 인계되변서 1873년에 메이지 정부에 의해 금교령이 폐지될때 까지 기독교 신앙이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그 상황에서도 많은 신자들이 신앙을 지켜냈고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으로 복귀하였다. 그러나 일부 신도는 긴 잠복기간 중 확립한 자신의 신앙형태를 유지하여, 현재에도 고토열도, 나가사키 인근 바다지역 주변, 히라도시의 이키츠키등 가쿠레 크리스찬 조직이 존재하고 독자적인 신앙행사가 계승되고 있다.
한편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스페인은 열렬한 가톨릭 신앙을 소유한 국가이다.
레콘키스타(Reconquista, 국토회복운동)가 끝나고 기독교 교도에 의해 통일국가가 된 15세기 말부터 17세기 말까지 스페인 미술은 왕후귀족의 초상화 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기독교 종교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같이, 사회적 평가는 대조적이지만 나가사키와 스페인은 기독교를 통하여 깊은 연관이 있으며, 스마 컬렉션이 나가사키현 미술관에 소장된 정당성은 명백하다.
스페인의 종교화와 초상화
이번 전시회에서는 나가사키에 기독교가 전해진 시대를 중심으로 스페인 종교화와 초상화 30점이 소개되었다.
중세 말기부터 근세에 걸쳐 교회와 왕국은 절대권력으로 병립하였고 가장 유력한 미술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성당과 수도원에는 그리스도, 성모마리아, 모든 성인에 대한 신앙과 숭배를 높이기 위한 [종교화]가 장식되었으며
국왕이나 귀족은 자신의 권세를 과시하기 위해 마음에 드는 화가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이 구조는 19세기 스페인 근대화의 막이 오를때까지 계속된다.
성당과 수도원의 미술장식은 중세초기부터 주로 벽화와 조각이었다. 그러나 후기에는 그림이 제단 뒤쪽 혹은 위쪽에 장식되었다.
<성 스테파노>에서 성인은 중세미술 특유의 정면관으로 그려졌고 머리에 돌을 올리고 있다. 이 도식적인 표현은 당시의 종교화의 목적이 성인이나 이야기의 재현적인 묘사가 아니라 기독교 교리의 정확한 전달에 놓여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근세 기독교 교회는 종교개혁에 의해 가톨릭과 개신교로 나뉘게 되는데, 스페인은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에 걸쳐 가톨릭 교회가 반종교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종교미술을 통제한다. 종교와 성직자는 새로운 시대의 종교화에 관하여 내용의 정확성을 전제로 관자의 마음에 호소하는, 신심의 고양을 재촉하는 표현을 강하게 요구했다. 관지의 마음이 향하는 그대로 신앙으로 인도되는 화면을 만들어내고 있다.
한편, 스페인 왕국의 왕후귀족은 합스부르크 왕조시대, 부르봉 왕조시대에 걸쳐 자신과 가족의 초상화를 남겼다.
16세기 후반 국왕 펠리페 2세는 스페인의 황금세기를 실현하였고 덴쇼겐오우 소년사절을 통해 유럽과 일본의 중요한 문화적 가교가 되었다.
<펠리페 2세>는 합스부르크 왕실의 전형적인 초상화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화가는 어두운 색조를 기조로 깔고 가능한 장식성을 배제한체 엄숙한 화면을 구축하고 있다. 반면에<페르난도 7세>의 초상화는 선명한 빨간색과 금색이 화면을 지배하고 있으며, 왕의 모습은 사치가 극에 달한 차림으로 그려져 있다.
부르봉 왕조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 7세는 18세기 스페인의 궁정화가 고야가 마지막으로 모신 왕이다.
그러나 그의 통치기 15세기부터 절대왕정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고야의 몰년(1828년)에는 이미 근대의 문이 열리려 하고 있었다.
고야 [어리석음]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년)는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의 궁정화가로 왕후귀족의 초상화를 그리는 한편, 시정의 화가로서 판화를 제작했다.
현재 “카프리쵸스(변덕)”, “전쟁의 참화”, “투우”, “어리석음”의 4대 동판화집이 고야의 판화작품으로 알려져있고, 투우를 제외한 대부분이 인간과 사회에 서려있는 부조리를 고발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고야의 말년에 새겨진 시리즈 [어리석음](1815~24년경)이 소개되었다.[어리석음]에 관한 동시대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고, 그 존재가 공개적으로 알려지는 데는 고야의 사후 1864년 산 페르난도 왕립미술아카데미의 출판을 기다려야 했다.
고야는 1824년 미완성의 [어리석음]을 자신의 별장[귀머거리의 집]에 남겨둔 채 조국을 버리고 보르도로 떠난다.
당시 스페인은 나폴레옹의 침략과 대불 독립전쟁을 거쳐 근대화의 길을 확실하게 찾아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이 격동의 시대를 넘어 실제로 직면한 것은 여전히 구체제의 자기모순을 외면하고 있는 조국이었다.
즉 [어리석음]의 어두컴컴한 세계는 근대유럽의 발전을 먼발치서 바라보면서 이성의 빛을 완강히 거부해온 당시의 스페인 그 자체이다.
이 연작 판화집은 18점 한 세트로 발간됬지만, 여기 포함되지 않은 4점이 1877년 프랑스 미술잡지[L`Art](라르)에 발표되어 이후 [어리석음]은 22점 구성으로 알려져 있다.
도마쓰 쇼메이의 사진
2012년 12월 14일에 타계한,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사진작가 도마쓰 쇼메이(1930~2012)는 원수폭 금지일본협의회의 의뢰를 받고 취재를 위해 1960년부터 다음해에 걸쳐 처음으로 나가사키를 방문한 이래 피폭자와 나가사키의 거리를 사진에 담아왔다. 1998년 나가사키에 이주하여 그 속에서 살아가는 한명의 시민으로서 매일같이 “거리산책”을 하면서 방대한 수의 사진을 남겼다. 그 중에는 가쿠레 크리스찬의 신앙행사와 묘지를 촬영한 작품도 다수 포함된다. 도마쓰가 오랜 세월에 걸쳐 촬영한, 동양과 서양의 문물이 혼재되어 독자적인 문화를 일궈온 나가사키, 약 반세기라는 긴 세월동안 촬영된 엄청난 수의 사진중 일부는 나선형을 그리는듯 시간을 거쳐 다시 같은 피사체를 향해 렌즈를 돌리고 있는것도 다수 존재한다.
현재 나가사키현미술관은 도마쓰의 작품을 614점 소장하고 있다. 이번에는 그중 130점을 “원폭자취,유물”, “반주자로서의 시선(피폭자)”, “나가사키의 역사”, “거리산책”이라는 4개의 섹션으로 크게 분류하여 소개하고 있다.
여행자의 시점에서는 결코 파악할 수 없는 나가사키의 표정,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에 숨어있는 나가사키의 중층적인 역사의 두께가 그 희비와 함께 표현되어 있다.
느낀점
스페인 미술이나 서양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정말로 감명깊게 감상했던 것 같다.
스페인 미술의 흐름을 개괄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고, 또한 왕실화가 프란시스코 고야의 동판화집을 보며, 왕후귀족과 교회를 중심으로한 당시의 사회에 대한 비평적 시선으로 당시 스페인의 이면을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동양과 서양의 문물이 혼재되어 독자적 문화를 일궈온 나가사키의 가쿠레 크리스찬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었고
원폭이 남기고 간 흔적, 피폭자들의 삶, 현재의 나가사키를 보며 전쟁의 상처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