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프리메이슨단의 발전과 세계에 끼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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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프리메이슨단의 발전과 세계에 끼친 영향
영국의 종교개혁과 비상 정국
로슬린 성당의 완성부터 1717년 6월 24일 잉글랜드 그랜드 로지의 공식적 출범까지, 성전 기사단으로부터 발전되어 프리메이슨단이 된 공동체는 비밀리에 사업을 진행했다. 자기 보존의 이유들로 이 조직은 16세기 바티칸 세력이 급속도로 쇠퇴할 때까지 대중의 시선으로부터 숨어 있었던 것.
그들이 드러난 계기가 된 것은 종교개혁 운동이었다. 당시 이 운동은 교회의 중세 악습을 몰아내고 교황 통치를 축소시키며, 개혁가들이 교회의 성서적 모델과 맞는다고 믿는 교리와 관습을 복구하기 위해 서구 기독교 세계 내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문예부흥기(르네상스)의 사제들은 성직 매매와 친인척 등용, 그리고 무책임한 재정적 낭비들을 공공연히 일삼으며 세속적이기로 악명이 높았다. 교회 자체는 검은돈과 부도덕투성이로 보였고, 이로써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혁가들 간에 불화가 생긴다. 이 개혁가들의 믿음과 행위들은 프로테스탄트라고 불리게 된다.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에 독일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비텐베르크의 아우구스티누스 대학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가 95개조를 교회 문에 붙여, 면죄부 판매에 대한 적법성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이 도화선이 된다. 교황권은 즉시 이를 수익성 큰 국제적인 독재에 대한 정치적인 위협으로 보고, 그 자유사상가를 이단으로 몰아간다. 1520년에 발표한 루터의 세 유명한 논문 <기독교 신앙의 개혁에 관하여 독일의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An Open Letter to the Christian Nobility of the German Nation Concerning the Reform of the Christian Estate>과 <교회의 바빌론 포로 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 On the Freedom of a Christian)는 그에게 대중적인 지지를 안겨준다.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죄의 용서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자유롭게 주어지는 선물이기에, 교황이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루터의 믿음이었다. 당연히 그런 예수와 같은 사고는 교황권에게 환영받지 못했고, 그는 1521년에 파문당한다. 하지만 루터는 매우 영리한 자로, 그해 4월에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독일 황제 카를 5세와 독일 영주들 앞에 서서, 성서나 또는 명확한 이유로 잘못되었다고 밝혀지지 않으면 자신의 뜻을 철회하지 않겠다고 선포한다.
영국에서도 마르틴 루터의 사상에 기초한 종교개혁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영국의 종교개혁은 교황의 월권 때문이 아니라, 왕 헨리 8세가 그의 첫 번째 아내였던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결혼 문제를 없었던 것으로 하려 한 움직임이 직접적인 결과가 되어 일어난 것이 확실하다. 교황 권력으로부터의 이탈은 왕의 총신 토머스 크롬웰에 의해 지휘되어, 그는 1533년 상소 제한법(Act in restraints of appeals: 의회가 어떤 소송도 교황청에 제기하지 못하도록 한 법령)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또, 이듬해에는 교회에 대한 왕실의 통제를 규정했던 수장법Act of Supremacy을 통과시킨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비록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캐서린 사이에서 나온 딸의 통치 기간 동안 잠깐 반전이 있었지만, 결국에는 영국국교회에 의해 대체된다. 1553년부터 1558년까지 통치했던 여왕 메리 1세는 일단 권력을 얻자, 전통적인 예배와 교황의 권위를 복구시키고 개신교도들을 처형하여 ‘블러디(피의) 메리’ 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가톨릭을 회복시켜 나간다. 1554년 그녀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아들인,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와 결혼한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불붙은 반란들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고, 결국 300명의 개신교도들이 신앙을 위해 화형당한다. 하지만 메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후계자였던 엘리자베스 1세 통치하에서 영국은 강한 개신교 국가로 성장한다.
로지 체계를 만든 왕
오늘날 프리메이슨단은 로지(지부)라고 부르는, 거의 10만에 이르는 개개 소모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각각에는 워십풀 마스터와 입문과 진급 의식을 행할 수 있는 일단의 간부 조직이 있다. 세인트클레어 가문의 로슬린 성당 건물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로지의 발전상을 되짚어 보자.
로슬린 건축 후에 ‘작업’ 로지(숙련된 석공들로 이루어진)의 개념이 좀 더 상위의 ‘이론적’ 로지(살아서의 부활을 통해 인정된 귀족들로 이루어진)와의 긴밀한 관련 속에서 번성해 나간다. 앞서 보았듯, 로슬린 성당 건물이 완성되자 이 자랑스러운 석공들의 비밀 조직들을 간단히 없앨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들만의 의식을 지녔고, 그들을 영주 및 솔로몬 왕의 신비한 고대의 과거, 나아가 그 너머와 연결해주었던 결사단의 한 부분을 지니고 있었던 것 이다.
다음 100년 동안 이 실질적으로 작업하는 석공들은 이론적 석공들의 한 분야로서 스코틀랜드에서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결국 세인트클레어 가문이 잊혀져감에 따라 그 체계의 기원은 동시대인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하지만 상항이 바뀌며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의식들이 자긍심 속에서 반복된다. 그 기원도 모른 채.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6세(또한 나중에 영국의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의 유일한 자식이었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모두를 지배하는 최초의 왕이었다. 그는 또한 프리메이슨으로 알려진 최초의 왕으로, 1601년 35세의 나이로 스쿤과 퍼스 로지에 입문한다. 1566년 6월 19일에 태어난 제임스는 겨우 15개월이 되었을 때에 가톨릭교도인 어머니의 뒤를 이어 스코틀랜드 왕위를 계승한다. 그러나 1583년이 되어서야 직접 스코틀랜드를 통치하기 시작한다. 그는 스승 조지 뷰캐넌으로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는다.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에 있는 세인트앤드루스 대학에서 교육받은, 대단히 지적인 인물이자 후기 문예부흥기의 가장 위대한 라틴 학자와 시인들 중의 하나인 뷰캐넌은, 그 어린 왕에게 강한 영향을 끼쳤음이 확실하다.
총명했던 어린 왕은 뷰캐넌의 지적인 지도하에, 스코틀랜드에서 교회와 나라의 수장으로서의 지위를 성공적으로 주장하며 그에 대항하여 음모를 꾸몄던 귀족들 위에 군림했다. 자식이 없던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어 영국의 왕위에 오르고자 열망했던 그는, 그의 어머니가 1587년 엘리자베스에 대한 반역으로 처형되자 단지 형식적인 항의만을 한다.
나이 37세, 프리메이슨이 된 지 2년 후, 제임스는 영국 최초의 스튜어트 왕이 되었고, 그 이래 영국 국사國事에 크게 전념한다. 비록 장로교인으로 키워졌지만 그는, 1604년 햄턴 궁전 회의에서 영국국교회의 개혁을 위한 청원을 기각함으로써 부흥하는 청교도 운동에 반대 입장을 보인다. 개신교 군주에 대한 로마 가톨릭의 적대감은 만연하게 된다. 1605년 가이 포크스가 왕과 의회를 화약으로 날려버리려는 시도를 주도하지만, 가톨릭교도들의 음모는 실패한다. 하지만 이 암살 기도에도 불구하고 영국에서는 제임스가 비밀리에 가톨릭 편이라는 의혹이 있었는데, 그가 1604년 에스파나와 평화조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이론적 석공이었던 제임스는 또한 왕권과 신학, 마법, 심지어 담배에 관한 책을 썼다. 아울러 의미심장하게도 그의 이름을 따라 명명된, 성서의 ‘공인된’ 새 번역판의 편찬을 지시한다. 바로 <킹 제임스 성경(흠정역)>(여기에는 마카베인들의 2개의 반反나사렛서가 빠진다). 이 개신교 성서 앞에 여전히 등장하는 서문에는 가톨릭에 대한 어떠한 호감도 드러나 있지 않다.
‘…따라서 한편으로 만일 우리가 본국에서나 외국에서 천주교인들에 의해 중상당한다면, 그들이 무지와 암흑 속에 남겨 두기 원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진실을 알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문단은 그 당시 가톨릭교회의 비밀스럽고 정치적인 이기주의와는 반대로 ‘지식’ 과 ‘사람들’ 이 함께해야 한다는 새로운 견해를 드러낸다.
현대 프리메이슨단은 무종파이며 언제나 그래 왔다는 것을 자랑하지만, 킹 제임스 흠정역 서문에서 보이듯 반가톨릭주의의 기간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렇듯 17세기 초기의 정황은 메이슨들의 비밀 공동체가 공공의 장으로 나올 완벽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왕 자신이 이론적 메이슨인데다, 스코틀랜드에서 교황의 권력이 발 붙일 틈이 없어진 상황에서 철저한 비밀 엄금의 필요가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제임스 왕은 사색가이자 개혁자였고, 성장하는 메이슨 운동의 구조가 좀 더 정식화되어야 한다고 느꼈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스코틀랜드 왕국을 실제로 통치하기 시작한 지 15년 후, 프리메이슨으로 받아들여지기 2년 전에 그는 기성 메이슨 구조에 지도권과 조직을 부여한다. 이에 따라 크래프트(조합)의 제너럴 워든 윌리엄 쇼에게 메이슨단의 전체 구조를 개선시킬 지시가 내려진다. 쇼는 1598년 12월 28일 이 주요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이 왕국 내에서 모든 마스터 메이슨들에 의해 준수되어야 할 규칙과 규정(The statutes and ordinances to be observed by all the master maissouns within this realme)’ 을 발행하며 자신을 ‘크래프트의 제너럴 워든(the General Warden of the said craft)’ 이라고 서명한다.
쇼는 이 공동체 형식이 거의 200년 전에 로버트 브루스 통치하에서 세인트클레어 가문에 의해 도입되었다는 사실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따라서 쇼의 시대에 와서, 실질적 석공조직의 통치를 통해 경제적 이득을 얻으려고 했던 세인트클레어 가문은 영향력 대부분을 상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쇼 로지들의 의식은 정식화되었지만 여전히 ‘고대 규정’ (14세기 이래로 전해져 내려온 메이슨 문서들로, 프리메이슨의 전설과 규칙, 규정들을 담고 있다.)에 기초했고, 오래된 구전에 따라 메이슨 말씀과 인사가 이루어졌다. 쇼는 이론적 메이슨들의 모임을 ‘로지’ 로 불렀고, 그의 일이 시작된 2년 후에 이전 스코틀랜드의 비밀 로지들은 단원들의 이름을 목록화하고 모임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존재를 널리 떠벌리지 않지만 우리는 오늘날 그들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크래프트 프리메이슨단의 세 등급으로 알고 있는 형식화 된 의식은, 윌리엄 쇼(제임스6세의 제너럴 워든)에 의한 실질적 및 이론적 메이슨단 모두의 규정이었다. 그는 개개인의 실제 메이슨들을 이론적 메이슨들의 하위 보조자들로 복귀시켰고, 그것에 의해 석공들의 ‘단위’ 를 창조했다. 이 각각은 이론적 메이슨들의 ‘로지’에 소속된다. 이론적 로지의 단원이 되기 위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사항은, 지원자가 그 로지가 위치하고 있는 도시의 자유 시민이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곧 이론적 메이슨은 ‘프리메이슨’ 이라는 호칭으로 실질적 메이슨과 구별되게 된다. 모든 단위는 한 로지에 소속되어야 했지만. 모든 이론적 메이슨들의 로지가 단위를 가질 필요는 없었다.
이 순간부터 프리메이슨단은 줄곧 로지 구조로 운영된다. 그리고 이는 곧 영국으로 들어가 마침내 전 서구세계로 퍼져 나가게 된다.
제2등급의 건축자들
우리는 크래프트 프리메이슨단 제3등급의 현재 내용이, 쇼가 신입 도제와 마스터 메이슨 사이에 이론적 메이슨단의 추가 등급을 끼워 넣기 전의 두 등급 안에 대부분 존재했다고 믿는다. 도입된 이 새 등급은 펠로크래프트(동업 장인)로 명시된다. 우리는 이것이 이 메이슨들이 진짜 석공들이 아니라 이론적 메이슨단의 ‘동업조합’ 에서 일하는 자들이었다는 사실로부터 나온 것이며, 마크 메이슨 등급이 발전된 것이라고 확신한다(아울러 대부분의 메이슨들도 그렇게 믿는 바).
1603년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가 되었을 때에, 그가 취한 최초의 행동 중의 하나가 프랜시스 베이컨에게 기사직을 수여하는 것이었다. 펠로 프리메이슨이었을 뿐 아니라 왕이 총애하는 사상가 중의 하나였던 베이컨은 6년 후 왕의 법무차관이 된다. 승진은 계속되어 제임스는 베이컨에게 국새관(왕의 인장을 받은 관인)인 법무장관의 직을 준다. 그리고 1618년 베이컨은 마침내 대법관이 되어 베룰럼 남작의 칭호를 얻는다.
메이슨 형제 베이컨은 역사상 가장 훌륭한 철학가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자신이 ‘우상’ 또는 ‘정신의 오류’ 라 칭한 인간 정신을 추방하고자 했으며, 인류의 자연에 대한 지배의 회복을 위한 아이디어들을 펼친 대작 (대혁신 Instauratio Magna)을 계획했다. 이는 다음 여섯 부분으로 구성된다.
- 과학의 분류
- 새로운 귀납 논리학
- 경험적이며 실험적인 사실들의 모음.
- 베이컨식 새로운 접근의 효과를 보여주는 예들
- 박물학에서 추론할 수 있는 개념.
- 완전한 자연과학이 될 새로운 철학
결국 그는 두 부분밖에 완성하지 못하는데, 1605년(1623년에 <과학의 존엄과 성장에 관하여 On the Dignity and Growth of Sciences>로 증보된)에 완성된 <학문의 진보 The Advancement of Learning>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서인 <오르가는 Organon>을 비난한 1620년의 <신기관 The New Organon>이 그것이다. 이 마지막 작품은 자신의 후원자 제임스 6세에게 헌정된다. 베이컨의 작품의 극치는 귀납에 의한 과학적 연구로, 이는 ‘형상’ 또는 구체적인 행위의 자연법칙을 찾을 것을 제안한다.
이렇듯 베이컨은 현대 귀납적 과학의 발전에 자극을 준 자로 높이 여겨진다. 그의 작품들은 화학자 로버트 보일과 물리학자 로버트 훅, 아이작 뉴턴 경과 철학자 토머스 홉스를 비롯한 여러 17세기 사상가들과 과학자들에 의해 높이 평가된다. 한 세기 뒤에 위대한 프랑스 철학자들인 볼테르와 디드로는 이 영국 사상가를 ‘현대 과학의 아버지’ 로 표현하기도 한다.
형제 베이컨이 그의 가까운 동료 윌리엄 쇼에 의해 도입된, 새로운 제2 등급을 만드는 배후 원동 세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왕의 프리메이슨단에서 과학의 진보와 자연에 관한 생각의 확장에 대해 그보다 더 열정을 가진 자는 아무도 없었으니. 베이컨은 자신의 메이슨적 지식을 그의 대중적 열망과 합쳐 저서 <뉴 아틀란티스 The New Atlantis>를 발간하는데, 이는 정신적 측면에서 솔로몬 성전의 재건을 위한 그의 계획을 공개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 순수한 에스겔적 환상은 ‘발명의 궁전’ 과 ‘과학의 위대한 성전’ 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건물이라기보다는 모든 가지들에서 지식의 추구가 최고 효율의 원칙 위에서 조직되어야 하는 새로운 국가로 시각화되는 것이었다.
이 작품에서 미합중국 헌법의 지적인 씨앗이 확고히 심긴다.
새로운 이설異說
프리베이슨 제2등급, 즉 ‘펠로크래프트’ 등급은 지원자에게 추가 정보를 거의 주지 않는다. 하지만 ‘자연과 과학의 숨겨진 신비들’ 에 대한 아이디어를 소개하며 ‘갈릴레오 이설’ 로 불리는 것에 대해 확실히 언급한다. 이 등급의 중심 주제는 오래된 것이겠지만, 그 의미는 주로 프랜시스 베이컨으로 인해 휠씬 더 최근의 것임이 분명하다. 이 새로운 의식은 자연과 그것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인간의 권리에 관한 것이다.
자연의 신비를 이해하는 전체 아이디어는, 로슬린 성당의 장식 속에 요약된 식물 백과사전을 상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앞서 보았듯, 그 건물의 정교하게 작업된 조각들은 ‘불가능한’ 아메리카의 종류들을 포함한 수백의 식물들 세부를 기록하고 있다.
자유로운 사고는 이미 분명히 이 ‘통제되지 않은 사고’ 의 개념에서 대단한 위험을 보았던 바티칸에 의해 새로운 형식의 이단으로 낙인찍히게 된다. 이로써 로마 가톨릭교회는 과학을 연구하는 자들의 박해에 나선다. 이 ‘사악한’ 사람들의 핵심적인 박해 인물은 바로 갈릴레오로, 그는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 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견해를 확증해줄 새로운 기술을 사용했다. 비록 이 개념은 기원전 3세기에 이집트인 에라토스테네스에 의해 최초로 설명되었지만, 그 개념의 좀 더 최근 지지자(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 1473~1543)를 따라 코페르니쿠스주의로 알려진다. 하지만 모든 항의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종교재판소는 1616년 초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반대하는 칙령을 발표한다. 갈릴레오에 의해 언급되고 교황의 교서에 의해 금지된 이설은, 프리메이슨의 제1등급에서 제2등급으로 옮기는 의식에 나오는 역설적인 질문에 대한 답에서 인용된다
- 질문: 너는 어디에서 메이슨이 되었는가?
- 답: 공정하며 완전한 정식 로지에서입니다.
- 질문: 언제?
- 답: 태양이 그 정점에 있을 때입니다.
- 질문: 보통 이 나라에서는 프리메이슨의 로지에 밤중에 입문하는데, 너는 어떻게 첫눈에 역설적으로 보이는 그 상황에 따를 수 있었는가?
- 답: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 천체이며 지구는 지속적으로 그 축을 똑같이 돕니다. 또, 프리메이슨은 사람이 살고 있는 전체 지구에 널리 퍼져 있는 보편적 과학입니다. 그러므로 태양은 프리메이슨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언제나 그 정점에 있어야 함이 당연합니다.
이 언급은, 갈릴레오가 지구가 태양 둘레를 회전한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생각이 정말로 옳다고 자신의 신념을 공개적으로 발표한 1610년 이후에나 삽입된 것으로 보인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이 새로운 자연의 진리를 자신이 최근에 만든 제2등급 내에 편입시켰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펠로크래프트 등급이 창안물이 아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마크 메이슨단과 아마도 원래의 2개의 등급(신입 등급과 마스터 계층)의 부분에 새로운 요소가 첨가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 의식 내에 모순을 낳는다. 지원자는 여호수아가 그랬듯, 손을 어떤 방식으로 머리 위로 들어 올려 비밀 표시가 만들어진다고 듣는다.
‘여호사밧 골짜기에서 주의 싸움을 할 때, 여호수아는 이 자세로 서서 태양이 멈추고 자신이 하나님의 적들을 전멸할 때까지 낮의 빛을 늘려줄 것을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여기에서 먼저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말씀과, 다음으로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돕기 위해 지구 주변을 도는 태양을 멈추게 하셨다는 말씀에는 분명 모순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모순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가 참으로 오래되었고 없애거나 비꾸기에는 너무 중요했기에 그대로 남겨졌다고 믿는다.
펠로크래프트 표시에 대한 이 설명이 <여호수아> 10: 12와 맞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 구절은 사실 여호사밧이 아니라 아얄론 계곡을 언급하고 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은, 이스라엘인들의 지도자였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여호사밧 골짜기가 이스라엘의 영토(우리가 이미 언급했듯, 여호사밧은 예루살렘의 남쪽과 동쪽을 지나는 기드론 계곡의 다른 이름이다)가 된 것은 다윗의 시대나 되어서였다. 우리는 이전에 구약성서의 여호수아 전설이 어떻게 그를 프리메이슨주의와 명백한 관련도 없이 약탈을 일삼는 잔인한 하비루로 그리는지 논의한 바 있다. 인용문이 담긴 구약성서의 다음 문단은, 여호수아와 같은 약탈자의 탐욕과 야훼의 명백한 광기 때문만으로 무고한 남자들과 여인들, 아이들이 대량 학살되는 무시무시한 만행 목록 중 하나다. 그 문단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어떻게 다섯 왕들과 그들의 모든 백성들 그리고 동물들이 땅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그 진군하는 하비루에 의해 살육되었는지 자랑하고 있다.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호흡이 있는 것은 모두 완전히 멸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하였더라.’
솔로몬 왕의 성전보다도 앞서 살았던 여호수아가 왜 메이슨 의식에서 언급되고 있을까?
하지만 Joshua, 또는 Yahoshua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또 다른 훨씬 더 특별한 성경 속 인물이 있으니, 바로 예수다. 그는 프리메이슨단에 극히 중요한 인물로서, 여호사밧 골짜기에서 위대한 ‘주의 전쟁’을 했다. 자신의 추종자들과 겟세마네 동산(여호사밧 골짜기에 있는)에 서서 마침내 적들에 맞서 전복을 꾀했던 것. 세케넨레 타오/히람 아비프의 고대 이야기를 알고 있었던 예수는 하나님에게 은유적으로 태양을 그 정점에 머물게 해달라고 요청했던 것 같다. 어둠의 세력이 가장 약하고 선의 세력이 최고로 높은 상태에 있도록 말이다. 불행히도 그는 그 전투에서 지지만 성전 기사단들 덕분에 종국에는 그 전쟁에서 승리한다.
이 지식은 펠로크래프트, 즉 제2등급의 이상한 표시를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준다. 야고보가 십자가에 매달려 한 말씀과 교회에서 그가 뒤이어 갖게 된 지도권이, 형제 예수의 행위에 깊이 감명받았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12장에서 살펴보았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처럼 중요한 일화가 성전 기사단원들이 발견했던 문서에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말이 안 된다. 야고보와 다른 쿰란인들은 <여호수아> 10:12의 페세르와 같이 여호사밧 골짜기에서 예수가 행한 것을 보았을 것이다. 제2등급의 표시에 대한 이 해석은 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의식을 의미 있게 해준다.
고대의 이정표
오래된 의식의 내용은 거의 손대지 않았고, 구전되어 오던 ‘고대 규정’은 잊지 않기 위해 우선적으로 기록된 것이 확실하다. 윌리엄 쇼는 ‘기사단의 고대 이정표들’ 을 보호하고자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 기록들은 오늘날에도 남아서, 제임스 6세에 의해 명령되고 쇼와 베이컨 및 다른 사람들이 수행했던 개선작업 전에 결사단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말해주고 있다. 그중 하나가 1607년의 <이니고 존스 사본 Inigo Jones Manuscript>이다. 저자에 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데, 그는 유명한 영국의 건축가이자 프리메이슨이었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그것이 50년 뒤에 이니고 존스 로지 단원에 의해 쓰였을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좀 더 믿을 만한 기록은 1610년(갈릴레오가 태양계의 구조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최초로 피력했던 바로 그해)에 송아지 피지 위에 적힌 <나무 사본 Wood Manuscript>으로, 32페이지의 16장이 되게 접힌 여덟 조각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메이슨단이 관련되어 온 과학들을 확인함으로써 시작하는데, 문법학, 수사학, 논리학, 수학, 기하학, 음악과 천문학이 그것들이다. 이것들은 암흑의 시대 동안 기독교 세계에서 사라졌던 고대의 고전적인 과목들이다. 하지만 이 학문들은 10세기 이래 에스파냐, 시실리, 북아프리카에 있는 아랍 학자들과 콘스탄티노플의 그리스 사상가들과의 접촉을 통해 다시 인정받기 시작한다. 무엇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라진 저서들이 재발견되었고, 아라비아의 과학적, 수학적 저서들이 서구인들을 위해 번역되었다. 그럼으로써 이것들은 17세기 초 다시 모든 식자들의 당연한 학문이 되어,더 이상 프리메이슨만의 전유물이 아니게 된다.
<나무 사본>은 계속해서, 태초 이래로 기하학이 가장 위대한 과학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또, 기사단의 역사를 노아의 대홍수 후에 발견된 2개의 기둥으로부터 보고 있다. 이 기둥 중의 하나는 발견되었고, 그 위에는 그것으로부터 수메르인들이 윤리 규범을 발전시킨 과학들의 비밀이 새겨져 있었다(이 규범은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를 통해 이집트인들에게 전해진다). 사본은 또한 유클리드가 이집트인들에게 기하학을 가르쳤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인들로부터 기하학을 예루살렘으로 가져가 솔로몬 성전 건축에 도입하게 된다.
이 17세기 원고들 중의 일부는 히람 아비프에 관해 언급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혹자는 그 인물이 비교적 최근의 창안물이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히람 아비프라는 이름은 이 핵심 인물을 가리키는 하나의 호칭일 뿐으로, 그는 또한 에이몬Aymon, 에이멘Aymen, 암논Amnon, 아 맨A Man, 또는 아멘 Amen 그리고 가끔은 벤나임Bennaim으로도 언급되고 있다. 아멘은 히브리어로 ‘신뢰받는 자’ 또는 ‘신의가 두터운 자’를 의미한다고 알려지는데, 이는 히람 아비프의 역할에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또, 아몬Amon 또는 아멘 Amen은 세케넨레 타오의 도시 테베의 고대 창조신의 이름이다. 여기에 고대와의 연관이 있을 수 있을까? 우리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A Man’ 이라는 이름에 특히 흥미를 느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8장에서 언급한 <창세기> 49:6의 저자들의 기술을 생각나게 했기 때문이다. 기억할 것이다. 우리가 세케넨레의 살해에 대한 언급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오 내 혼아, 너는 그들의 비밀에 들어오지 말며 그들의 모임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내 명예야, 너는 그들과 결합하지 말지어다.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분노로 사람a man을 죽이고 그들의 완고함으로 벽을 파 내려갔도다.’
여기에서 ‘A Man’ 으로 언급되고 있다고 해서, 분명히 이름 없던 희생자가 실제로 그렇게(이 ‘A Man’ 은 초기 메이슨이 히람 아비프를 칭했던 이름이며 테베의 창조신 이름이다) 불린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또, 기독교인들이 기도가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 끝에 ‘아멘’ 이라고 부르는 것이 우연의 일치일까?
다른 이름인 벤나임은 메이슨 연구자들을 어려움에 빠뜨렸다. 히브리어에서 끝의 ‘im’ 은 복수를 만든다고 알려졌고, 첫 부분은 ‘건축자’ 를 의미한다고 한다. 나아가 우리는 그것이 ‘벤벤benben’ 돌로 불리는 작은 피라미드로, 꼭대기가 덮인 신성한 기둥을 가리키는 고대 이집트 용어에 기초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단어는 ‘신성한 기둥들의 건축자’를 의미하는 매우 오래된 서술일 수 있다. 그것은 히람 아비프의 글자 그대로의 서술로서, 그리고 예수의 은유적 서술로서 충분히 일리가 있다.
그때까지 프리메이슨은 제임스 왕의 팀에 의해 형식이 갖추어지고 있었고, 이름의 기원은 혼동되고 부분적으로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이 17세기 프리메이슨들은 자신들의 기사단이 어디에서 왔는지 잘 몰랐던 반면, 그것이 품고 있는 지혜의 중요성은 이해했다. 이는 17세기 불붙은 학문을 향한 열정에 의해 고무된다.
제2등급 의식에서 지원자에게 주어지는 질문이다. ‘이 등급에서는 특별히 무엇을 연구해야 하는가?’ 그가 해야 할 답은 ‘자연과 과학의 숨겨진 비밀들입니다’ 다. 입문이 끝나면 새로운 펠로크래프트는 다음 말을 듣는다 ‘이제부터 너는 자유 7과목과 과학들을 연구해야 한다.’ 이것은 17세기 중반의 위대한 프리메이슨들이 거부할 수 없었던 제안이었다. 프리메이슨의 17세기 발전상을 분석한 결과, 우리의 마지막 임무는 어떻게 프리메이슨이 나아가 현대 세계 속에서 성공을 이룰 수 있었는지 이해하는 것이었다.
1625년, 프리메이슨이었던 제임스 6세가 죽고 둘째 아들 찰스가 왕위를 이어받는다(제임스의 첫째 아들 헨리 왕자는 1612년에 죽었다). 새로운 왕은 아버지의 전철을 밟아 프리메이슨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프리메이슨의 상징 으로 가득 찬 수많은 묘지들이 에든버러의 홀리루드 사원 북쪽 벽 내에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데, 그곳은 찰스가 1633년 자신의 스코틀랜드 대관식을 위해 새로 꾸민 곳이다. 하지만 그는 프랑스 앙리 4세의 딸인 가톨릭교도 앙리에타 마리아(헨리에타 마리아)와 결혼함으로써, 대부분이 개신교도들인 자신의 백성의 눈에 불길한 첫발을 내딛는다. 제임스처럼 왕의 신성한 권리를 강하게 믿었던 찰스는 거만한 것으로 비추어져 의회와의 충돌을 가져오고, 결국에는 시민전쟁을 낳는다. 그 젊은 왕은 친한 친구인 버킹엄 제1공작 조지 빌리어스에게 강하게 영향을 받았으며, 대부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를 수상으로 임명한다.
끝까지 의회와 사이가 안 좋았던 찰스는 자신의 독단적인 요구사항들에 의회가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4년 만에 그들 중 셋을 해산시킨다. 1628년에 세 번째 의회가 열렸을 때에, 그들은 국민의 민권을 위해 왕의 개혁을 요구하는 ‘권리 청원’ 을 제출한다. 이를 받아들이도록 강요되었던 찰스는 이를 용인한 뒤 다시 한 번 의회를 해산시키는 것으로 대응했고, 몇몇 의회 지도자들을 투옥시킨다. 정치적 경영에 있어 아버지처럼 유능하지 못했던 찰스는 계속적인 의회와의 불화로 의회 없이 11년 동안 통치를 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의 인기도를 깊이 떨어뜨린 행정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특별 재정책을 도입한다. 이에 따라 전체 왕국은 그의 독재하에 불안정해지기 시작한다. 재미있게도, 다른 시대에는 나쁘기만 했을 그러한 사회적 격변이 그 시대를 역설적인 기회의 시대가 되게 한다. 새로운 사고가 충만했고, 기성 질서의 연속성의 붕괴는 그 용광로 속에 모든 가능성들을 넣어주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는 17세기 영국의 이 기간과 예수와 나사렛 운동 시기의 이스라엘에서 발견된 정황들 간에 유사성이 있다고 점점 더 크게 느끼기 시작했다. 이 유사성들은 프리메이슨에서 발견되는 가르침들을 영국 시민혁명 관련 모든 주요 집단들에 특히 연관되게 한다. 첫번째 유사점은 하나님과 관련짓는 과정에서의 충돌에 대한 것이다. 600년 전의 유대인들과 같이 그 나라에 있는 거의 누구나 다 하나님이 만물의 중심에 계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설명하는 최선의 방법에 관한 의견은 분분했다. 예수 시대에는 야훼로 향하는 유일한 공식 통로인 성전의 임명된 권위자들로 구성되었던 산헤드린, 즉 평의회 및 로마제국의 통치를 인정했던 사두개파가 있었다. 심지어 의롭다고 여겨지는 바리새파조차도 신앙의 기초를 잃어버렸다고 예수에 의해 비난받았으며, 예수는 공개적으로 그들의 권세에 반대했다. 우리의 관점에서 공화주의자나 다름없었던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합법적인 지도자로 하는 ‘의로운’ 사람들의 규정을 만들고자 한다. 그는 하나님에게로 이끄는 길의 통제를 주장하는, 거만한 이기주의자들을 제거하고자 했던 반관료주의자였던 것이다. 확실히 그는 반체제였고 우리는 그를 그 시대의 청교도라고 설명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단순성, 종교적 경건함과 자유를 위해 분투하고 그것을 위해 싸우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자. 16, 17세기에 가톨릭교회는 자신들의 부풀려진 자아 속에서 경건함을 잃은 편안한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운영되었고, 오직 교황만이 하나님과 만날 권리를 가졌다는 그들의 주장은 닳고 닳았다.
‘Q’ 로 알려진, 재구성된 원래 복음서에서 발견된 바리새파에 대한 일부 비판은, 17세기 청교도들이 로마 가톨릭교회를 겨냥하고 있었던 비난과 매우 비슷하게 들린다. QS 34(재구성된 복음서 ‘Q’ 중에서)에서 예수가 한 일부 말씀은 이 후대에 매우 적절한 것으로 다가왔다.
‘바리새파여 부끄러움을 알지어다! 네 컵과 주발의 밖은 깨끗이 하나 안은 탐욕과 음란으로 가득 찼도다. 어리석은 바리새파여! 안을 깨끗이 하라, 그러면 밖도 깨끗해지리니.
바리새파여 부끄러움을 알지어다! 회중의 앞좌석을 사랑하며 시장에서 인사하기를 좋아하는구나. 부끄러워할지어다! 너는 밖으로는 아름다우나 안은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찬 무덤 같도다…
율법주의자들아 부끄러워할지어다! 너는 사람들에게서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버렸도다. 너희 자신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않으며 들어갈 자들도 못 들어가게 하는도다.’
‘바리새파’ 나 ‘율법주의자들’ 을 ‘추기경들’ 로 바꾸면 바로 청교도적으로 들리게 된다!
그 두 기간을 잇는 우리의 두 번째 생각은, 영국에서의 교황 세력의 종말과 왕이라는 개인의 성직 및 세속 권위의 결합에 관한 것이다. 교회가 세워진 이래 처음으로 제사장과 왕 기둥을 하나로 연합하려는 예수의 뜻이 이루어졌다. 이 부록 편을 작성하면서 영국 시민혁명에 관련해 수집한 자료를 살펴보기로 한 우리는, 예루살렘 교회와의 관련에 대해 우리가 알아내었던 모든 것을 확인해주는 17세기 삽화를 발견하게 된다. 이는 ‘mishpat’ 과 ‘tsedeq’ 의 왕 및 제사장 기둥들의 세부를 그림으로 보여준 17세기의 조각으로, 정확히 우리가 고대 유대 문서들을 읽으면서 이해했던 그대로였다.
단 하나의 차이점은 쐐기돌이었던 인물. 이 그림에서 찰스 1세는 자신을 기둥들을 함께 묶어주는 쐐기돌로 밝히는데, 왼편 기둥은 ‘진리’ 의 인물이 올라가 있는 ‘교회’ 의 형식을 띤 ‘tsedeq’ 이며, 오른편 기둥은 ‘정의’ 인물이 올라가 있는 ‘나라’ 의 형식을 띤 ‘mishpat’이다. 흥미롭게도 찰스의 아들 찰스 2세는 1667년 시민혁명 후에 홀리루드 사원을 재건하면서 그 출입구에 이 도안을 넣으려고 했다.
이 상징을 사용함에 있어 찰스 1세는 예수의 발자취를 철저하게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 왕에게는 그 유대 지도자의 완전한 재기才氣와 공화주의자적 명석함 모두가 부족했다. 예수는 사회 질서가 야훼가 주신 율법과 조화되어 운영될 때에 대제사장의 역할이 필요 없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하나님이 이 땅의 왕을 통해 직접 ‘샬롬’ 의 나라를 유지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반면, 찰스 왕은 하나님을 그저 멀리 떨어져서 자신을 위해 협력하는 존재로 본다. 프리메이슨단은 이미 그 원래의 핵심 의미 일부를 잃은 고대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화주의자들의 봉기
찰스 1세가 왕위에 오른 지 3년 후에, 공화주의적인 개념을 가진 젊은 평민이 헌팅던의 의원으로 의회에 들어온다. 그는 윌리엄스 가족으로 웨일스 출신인 올리버 크롬웰. 그의 가족은 올리버의 고조부의 삼촌이었던 헨리 8세의 장관, 토머스 크롬웰 덕분에 비천한 처지로부터 출세하게 되고, 감사의 표시로 후원자의 이름을 채택한다. 새로이 이름을 얻은 크롬웰 가족은 곧 헌팅던의 케임브리지셔 마을에서 저명해졌고 1599년 4월 25일, 그곳에서 올리버가 태어난다. 이제는 유복해진 크롬웰 가족은 아들을 토머스 비어드라 불리는 지도적인 청교도에 의해 교육받게 한다. 그는 영국국교회로부터 로마 가톨릭 요소의 잔재를 ‘정화’ 하고자 하는 바람을 거리낌 없이 말하던 자였다. 후에 크롬웰은 눈에 띄게 청교도적인 시드니 서섹스 대학과 케임브리지 대학에 다녔을 뿐 아니라, 런던에서 법을 공부했다. 1620년 8월 엘리자베스 바우처와 결혼한 뒤 아버지의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헌팅던으로 돌아온 그는, 약 8년 후에 헌팅던 하원의원이 된다.
다음 10년에 걸쳐 크롬웰은 본격적으로 청교도적 견지를 발전시킨다. 하지만 아내의 삼촌으로부터 일리에 있는 재산을 상속하면서 다시 부흥하기 전에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다. 1640년 크롬웰은 찰스 1세와 청교도들 간의 관계가 위기상황에 달하고 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을 바로 그때에 의희로 돌아왔다(1629년에 의회가 해산되었기에). 2년 뒤인 1642년 8월 22일에 청교도가 지배적인 의회와 왕의 추종자들 간에 청교도혁명이 벌어진다. 크롬웰의 기민한 군사적 마인드는 재빨리 종교적인 열정으로 전쟁을 이길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의회 편에서 싸울 기병대를 모집한다. 내전 초기에는 왕정파가 우세했으나 올리버 크롬웰의 등장으로 전세는 역전되었다. 훌륭한 지휘관으로서의 크롬웰의 능력은 인정된다. 1644년 원두당원으로 알려진 의회 군대를 이끌고 마스턴 무어의 치열한 전투에서 승리를 이끈 그는 그 자신과 군대에 ‘철기병’ 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이 승리는 의회당원들을 위한 일종의 전환점이 되어준다. 왕당원은 다시 한 번 레스터셔에 있는 네이즈비에서 토머스 페어팩스 경의 의회군에게 패배한다. 계속되는 전쟁은 1646년 6월 24일 왕당원의 수도 옥스퍼드가 함락될 때까지 원두당원(의회군)들의 뜻대로 되어갔고, 스코틀랜드인에게 항복한 찰스는 의회에 잡혀 감옥에 갇히게 된다. 리치필드의 스태퍼드셔 마을은 몇 주간 버텼지만, 내란의 처음이자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로써 끝이 난다.
많은 사람들은 올리버 크롬웰이 프리메이슨이었다고 믿는다. 이 주장을 증명할 만한 어떤 결정적인 기록도 아직은 없지만, 정말 그래 보인다. 확실히 그의 상급자이며 가까운 친구 토머스 페어팩스 경은 크래프트의 단원이었다. 요크셔 일클리에 있는 페어팩스 가문의 영지에는 아직도 메이슨 성전이 있는데, 나선형 계단으로 내려가면 2개의 받침대 없는 기둥들이 서 있는, 바닥이 흑백으로 포장된 방이 나온다. 오늘날 이 건물은 한 대기업의 법인 본부이지만, 몇 마일 떨어진 기슬리 마을에는 여전히 ‘페어팩스’ 라는 이름의 로지가 있다.
이 기간의 프리메이슨단에 대한 최고의 정보 출처 중의 하나는 일라이어스 애쉬몰의 일기다. 이는 여섯 권의 일기와 부록 한 권이 더 있는, 가공할 만한 방대한 서적이다. 로버츠 대학 도서관의 사서는 어느 여름에 일기 전체를 읽어볼 심산으로 일곱 권 전부를 꺼냈을 때에 그 방대함에 대경실색했다고 한다! 그 시대를 알기 위해 일기를 읽기로 한 우리는 사실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다행히 왕립협회Royal Society와 왕정복고 Restoration를 이끈 사건들을 조명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매우 특이한 모임들에 관한 언급을 발견했다.
일라이어스 애쉬몰은 함락 당시 옥스퍼드에 있는 왕의 병기 관리자였으며, 프리메이슨의 공식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 중의 하나다. 자신의 편이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을 본 넉 달 후에 그는 워링턴으로 가서 크래프트에 입문한다. 1646년 10월 16일 일기의 처음은 이렇다.
‘오후 4시 30분, 나는 콜과 함께 랭카셔 워링턴에서 프리메이슨이 되었다. 그 당시 로지에 있던 자들의 이름은 이러하다…’
그 당시 옥스퍼드에서 워링턴으로 가는 길은 길고도 힘든 여정이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입문한 바로 그 다음 날 애쉬몰은 런던의 의회 본거지로 향했다.
여전히 긴장감이 높았고, 모든 이전 왕당파 관리들이 런던의 20마일 이내로 들어오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던 정황을 볼 때에, 이는 좀 이상한 행보다. 왕의 병기 관리자였던 애쉬몰이 몰래 갈 수는 없는 법. 그는 거기에 갈 좋은 이유가 있었고, 또한 어떤 확실한 신변보호책을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공문서 보관소에 보관된 1650년 5월 14일자 기록은 그 방문의 예외적인 성격과, 그것이 일시적인 방문이 아니라는 것을 학인해준다.
‘그(애쉬몰)는 의회 법령에도 불구하고 런던에 거주한다.’
이 왕당원 프리메이슨이 수년 동안 런던에 대놓고 살며 고위 의회파들과 교제했다고 생각할 만한 좋은 이유가 있다. 그가 프리메이슨, 즉 두려움도, 악의도 없이 왕당원이 원두당원을 만날 수 있고 가톨릭교도가 청교도를 만날 수 있었던 형제애 구조를 제공했던 유일한 비종교적, 비정치적 조직의 단원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 번 애쉬몰의 일기는 우리에게 귀중한 정보를 주었다. 1652년 6월 17일 일기의 시작은 이러하다.
‘오전 11시: 월킨스 박사와 미스터 렌이 블랙프라이어즈로 나를 보러 왔다. 이로써 나는 박사를 처음 보았다.’
언급된 미스터 렌은 위대한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 경으로, 1666년 런던 대화재로 런던이 크게 파괴된 뒤에, 세인트 폴 대성당을 비롯한 많은 훌륭한 교회를 세운 인물이다. 렌은 프리메이슨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이를 지지할 증거가 전혀 없으며, 어떤 증거는 그가 프리메이슨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윌킨스 박사는 프리메이슨 단원임이 분명하다. 이 만남이 있던 때에 존 윌킨스는 옥스퍼드 대학 워덤 칼리지(렌은 그당시 같은 칼리지의 동료였다)의 관리인이었지만, 나중에 체스터의 주교 및 왕립협회의 창설 멤버가 된다. 윌킨스는 의회파 지지자였고, 상당히 고위급 청교도로서 올리버 크롬웰의 여동생 로비나의 남편이자 크롬웰 자신의 전前 목사였다.
애쉬몰이 윌킨스를 만날 때까지, 그는 6년 동안 런던에 있었고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왕은 스코틀랜드인들의 도움으로 전쟁을 재개했지만 패배한 뒤 프레스턴에 포로로 잡혀갔고, 프리메이슨 왕이 마침내 프리메이슨 의회당원에게 진다. 1649년 1월 20일 찰스 1세는 런던 웨스트민스터 국회 의사당에서 재판에 회부된다. 그는 재판의 정당함을 인정하지 않았고, 폭군이자 살인자 그리고 국가의 적이라는 비난에 대해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일주일 후에 사형선고를 받고, 1월 30일 공개적으로 침수형에 처해진다. 군주정체가 사라지고 잉글랜드가 자신의 지배하에 들어오자 크롬웰이 행한 첫 번째 임무는,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정복이었다. 그가 드로이다와 웩스퍼드를 점령한 뒤 이어진 대학살은 처참하고도 과도했으며, 이는 아일랜드인과 로마 가톨릭 모두에 대한 그의 불타오르는 증오심의 결과였다. 올리버 크롬웰이라는 이름은 그 사건이 있은 지 350년이나 지난 지금도 여전히 아일랜드에서 두려움과 분노를 불러일으킬 정도다.
스코틀랜드는 크롬웰의 분노의 주요 대상으로, 그는 기회가 닿는 어디에서나 왕당원 성들과 가톨릭 교회들을 파괴했다. 하지만 전에 살펴보았듯, 로슬린에 있는 메이슨 성당은 크롬웰과 조지 몽크 장군 모두에게 그 존재가 알려져 있어서 전쟁 통에도 안전할 수 있었다.
난폭함에도 불구하고 크롬웰은 상대적인 평화와 안전 유지에 성공했고, 또한 역설적으로 어느 정도의 종교적 관용을 허용한 체제를 갖추도록 한다. 또, 그는 가톨릭교도들은 좋아하지 않았던 반면, 1290년 이래 잉글랜드로부터 추방된 유대인들을 1655년 돌아가도록 허락한다. 이는 메이슨 의식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나온 행동이다. 크롬웰의 강력한 대외 정책과 육,해군의 공적은 반세기 동안 누려보지 못한 대외적 세력을 잉글랜드에 가져다 준다.
찰스의 참수로 잉글랜드의 왕위는 양도되었고 나라는 세계 최초의 의회 공화국이 된다. 다음 해에 죽은 왕의 아들 찰스는,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스코틀랜드에 도착하여 1651년에 그 나라의 왕이 된다. 그는 즉시 잉글랜드를 침략한다. 그러나 안정적으로 조직화된 새로운 의회 정권은 이 대담하지만 계획이 미비한 공격에 당황하지 않았고, 우스터에서 패한 찰스는 다행히 프랑스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이 다난한 시기 내내 그 이전 왕의 병기 관리인은 크롬웰의 런던에서 문제없이 살며, 양쪽의 가장 지적이며 영향력 있는 사람들과 교제하고 있었다. 애쉬몰은 최고위층으로부터 단순히 정치를 초월한 사명을 따르도록 허가받았음이 분명하고, 전적으로 프리메이슨에서 나왔을 그의 사명은 매우 새롭고 중요한 무언가로 발전하고 있었다.
애쉬몰은 프랜시스 베이컨의 제2등급 프리메이슨의 요구대로 천문학자들과 수학자들, 물리학자들과 자연 및 과학의 숨겨진 신비 속으로 자신들의 지식을 확장시키고 있던 다른 자들의 친구나 면식 있는 자가 된다. 그가 속한 곳으로, 모임이라고 하기까지는 뭐하지만 그 존재가 매우 명백했던, 과학자들의 협회인 ‘보이지 않는 학회Invisible College’가 있었다.
1658년 9월 3일 노령으로 죽은 크롬웰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매장된다. 나약한 그의 아들 리처드는 권력을 계속 지탱하지 못했다. 그 결과 나라는 재빨리 무정부 상태에 빠진다. 하지만 1660년 5월 군대를 이끌고 런던으로 행군한 스코틀랜드 육군 사령관 조지 몽크 장군에 의해 사태는 정지되었다. 그는 장기 의회를 소집하여 찰스 2세를 왕으로 세움으로써 군주정체를 복구하도록 한다. 새로운 왕은 곧 자신에게 그토록 큰 고통을 안겨준 자에 대한 복수로, 크롬웰의 시신을 파내어 반역자로서 교수형에 처한 뒤 머리를 웨스트민스터 홀 위에 설치된 기둥 위에 둔다.
왕립협회의 출현
공화제에서 군주제로의 복귀는 개인적으로 애쉬몰에게 환영받았겠지만, 또한 그 ‘보이지 않은 학회’ 에 이익을 가져다준다. 1662년 찰스 2세가 수여한 특허장으로 왕립협회가 창설되는데, 이는 ‘우주의 위대한 건축가’에 의해 창조된 신비를 이해하는 데에 헌신했던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의 세계 최초의 회합이었다. 프리메이슨 체제 속의 시민권은 풋내기 공화국을 만들고, 그것이 실패하자 지식의 한계를 확장시켜 계몽의 시대를 낳음으로써 19세기와 20세기의 산업 사회를 위한 기초가 된다. 잉글랜드가 공화국으로서 보낸 잠깐의 시간은 그저 허비된 것이 아니었던 것. 그때부터 군주들은 신성한 통치권이라는 개념을 잊고, 국민과 국가의 민주적 의지를 대변하는 영국 하원의 권위를 존중하게 된다. 몇 년 후, 민주적 권리가 가난한 국민들과 마침내는 여성들에게까지 퍼진다. 예수로 불리던 자의 이상이 실현되는 데에 꽤 오랜 시간이 걸린 셈이다.
여기에서 프리메이슨단은 나사렛인들, 특히 예수 정신의 씨앗을 옮겼음이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왕립협회는 베이컨이 제2등급 프리메이슨에 대해 명확히 했던 사고의 온실로부터 싹텄으며, 청교도전쟁의 상처 후에 애쉬몰과 월킨스 같은 자들에 의해 조직화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한다. 17세기 수학자, 존 윌리스는 왕립협회의 시작에 대한 기억을 기록하고 있다.
‘나는 그 장소와 기초가 늦어도 1645년경 런던에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그 때 월킨스 박사(그 후에 런던에서 팔라틴 선제후의 목사가 된)와 사람들이 일주일에 한 번 어떤 날, 일정 시간에 벌칙을 두고 만나, 동의된 실험을 실시했다(다른 담화로 빠지지 못하게 하거나 기타 이유들 때문에). 신이나 정치 그리고 우리 철학과 관련되지 않은 것에 대한 모든 대화는 금해진다.’
이 새로운 사상가들의 초창기의 만남에 대한 서술은 두말할 것 없이 메이슨적이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벌칙하에 정치와 종교에 관한 모든 주제를 철저하게 금하는 매주의 만남은, 여전히 프리메이슨 로지의 특징인 것이다.
윌리스의 이 비밀 누설은 초기 왕립협회의 메이슨 집단에 의해 교정되고, 그들은 스프랫에게 윌리스가 부주의하게 누설한 메이슨 규칙들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 왕립협회의 공식 역사를 쓰도록 한다.
애쉬몰과 관련되었던 가장 영항력 있는 과학자들 중의 한 사람은 로버트 후크로, 그는 왕립협회 최초의 실험 감독으로 임명받는다. 다음 15년에 걸친 그의 풍부한 실험과 증명, 논문들은 초창기 협회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한 강한 힘이었다. 후크는 런던 대화재(1666년) 이후의 3명의 도시 측량자 중의 하나였고, 생물학 연구를 위한 현미경의 초기 제안자로 ‘세포’라는 현대 생물학 용어를 만들어낸다.
그 당시의 위대한 사람들은 모두 왕립협회에 들어오고자 했다. 그들 모두 중에서 아마도 가장 위대했던 인물은, 우주의 중력 구조에 대한 놀라우리만치 자세한 분석을 비롯하여 많은 업적을 이룬 아이작 뉴턴이었을 것이다. 1672년, 뉴턴은 왕립협회의 특별회원으로 선출되고, 같은 해에 협회의 <철학회보>에 빛과 색에 관한 새로운 이론에 대한 첫 과학 논문을 발표한다. 왕립협회가 왕실의 인가를 받은 지 25년 후에 뉴턴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또는 <원리 Principia>로 널리 알려진 책을 발행한다. 이 주목할 만한 작품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 서적으로 여겨진다.
왕립협회의 초기 회원들 모두가 사실상 메이슨들이었던 반면, 시간이 흐르면서 프리메이슨단은 그들에게 인기가 시들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 지식인들의 모임에게는 더 이상 비밀 및 종교적, 정치적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한 크래프트의 보호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라이어스 애쉬몰과 로버트 모레이(1641년에 잉글랜드에서 가장 처음 프리메이슨으로 입단했다고 기록된), 존 윌킨스, 로버트 후크 그리고 1681년에 회장이 된 크리스토퍼 렌이 새로운 협회에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기울인다. 이 잘 기록된 사실들로부터 우리는 프리메이슨 단원들이 왕립협회를 세웠으며, 재구성된 제2등급에 집중함으로써 세상을 새로운 과학의 시대로 이끌었다는 것이 매우 확실함을 알 수 있다. 몇 년 후 아이작 뉴턴 경의 회장 재임 동안, 슈발리에 램지로 알려진, 유명한 고위 프랑스 프리메이슨이 과학적 자격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왕립협회의 회원이 된다. 프리메이슨의 대부분의 최고의 지성들이 시간과 에너지를 새로운 협회에 쏟아부음으로써 런던에 있는 크래프트는 소홀히 여겨지고 경시된 듯해 보인다.
프리메이슨단 궤도에 오르다
1717년까지 런던지역의 프리메이슨단은 쇠퇴기에 있었고, 정규 모임을 갖는 로지는 네 곳밖에 없었다.
- 세인트 폴 성당 경내의 구스 앤 그리디론.
- 드루리 레인 근처 파커 레인의 크라운.
- 코벤트 가든 찰스 가의 애플트리 여인숙
- 웨스트민스터 채널 로의 러머 앤 그레이프스 여인숙
런던에 있는 크래프트가 전통적인 정체성의 상실 위기를 겪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여전히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이었겠는가? 프리메이슨단은 갑자기 성공의 희생자가 된다. 교회로부터의 오랜 기간의 위협을 극복했고 민주주의에 시동을 걸었으며, 계속적인 과학적 연구의 분위기를 만들어낸 성공 말이다. 하지만 그 나라의 나머지 지역에서 메이슨 로지는 자리 잡기 시작했고 점점 인기를 얻어간다. 1705년에 만들어진 그랜드 로지는 요크에서 정기 모임을 시작한다. 귀족들이 지속적으로 후원했던 이 최초의 그랜드 로지는 ‘전全 잉글랜드 그랜드 로지’ 라는 명칭을 주장한다. 런던에서도 무언가가 이루어져야 했기에, 위의 네 로지들이 1717년 2월 애플트리 여인숙에 모여 고위 메이슨을 단장으로 선출한다. 이 메이슨의 이름은 문헌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그 모임은 확실히 전체 결사단을 다스릴 그랜드 마스터를 선출할 목적으로, 6월 24일 집회를 갖기 위해 네 로지들을 구스 앤 그리디론에 전부 모으기로 결정한다. 같은 해 세레요한 축일 집회와 연휴가 열렸고, 앤서니 세이어가 다음 해의 그랜드 마스터로 선출된다. 새로운 잉글랜드 그랜드 로지는 많은 규칙을 정한다.
‘지금까지는 제한이 없던 메이슨 모임의 특권은 일부 로지나 일부 장소에 소집된 메이슨 회합에 한정되어 주어져야 한다. 그리고 차후에 소집되는 기성의 네 로지들을 제외한 모든 로지는 그랜드 로지의 동의 및 인가를 받아야 하며, 일부 개인들이 활동하기 위해서는 신청으로 그랜드 마스터로부터 일시적인 위임장을 받아야 한다. 위임장이 없는 로지는 정식 또는 합법적인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오래전부터 내려온 공동의 모든 특권을 계속 누려야 한다. 그랜드 로지에서 차후에 만들어지거나 통과될 어떠한 법규나 규정 또는 규제도 그러한 특권을 폐지해서는 안 되며, 또는 그 당시 메이슨 조직의 기준으로 세워졌던 어떠한 이정표도 침해해서는 안 된다.
협회의 미래의 법규를 규제할 기준으로서 원래의 구조를 고칠 필요성은, 이 당시 전체 형제에 의해 명확히 이해되어 공적이든 사적이든 모든 모임에서 그랜드 마스터를 만드는 틀림없는 규정으로 정해졌고, 모든 로지의 마스터들과 워든들은 그들의 조직을 지지할 것을 보증한다. 또, 모든 메이슨은 입문 시의 가장 강한 의무에 의해 묶인 바 된다.’
프레스톤Preston: <삽화 프리메이슨 Illustrations of Freemasonry>
선출된 그랜드 마스터의 통제하에 그랜드 로지를 만듦으로써 그 네 로지들은 효과적으로 메이슨단의 지배 체제를 세워, 자신들만이 그 명령에서 면제되고 다른 모든 메이슨들은 그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했다. 그들은 어떤 로지를 정식으로 할 것인지, 또는 정식 로지 목록에서 삭제해버릴 것인지 선고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그들의 권리는 다른 메이슨들, 특히 요크 메이슨들의 반발을 산다. 그들은 결사단의 정식 승인된 이설에 동의하지 않는 어떤 새로운 이설도 막기 위한 런던의 독단적인 사명을 인정하지 않았다. 정식 단체로 형식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면서 잉글랜드 프리메이슨단은 이미 그 길을 잃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새로운 조직은 오랫동안의 내분 뒤에 모든 것을 통합했고, 크래프트의 고위층은 이 세계에서 가장 공화주의적인 조직으로부터 영향력을 지키고자 하는 왕실 가족들에게로 서서히 넘어간다. 프리메이슨단과 왕실의 이 연계는 우리가 보기에는 잉글랜드 군주정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주요 이유였다.
잉글랜드 그랜드 마스터의 목록을 작성해보니, 귀족사회와 왕족에 편향된 경향이 두드러져 보인다. 이 목록을 스코틀랜드의 전前 그랜드 마스터들의 기록과 비교해보면, 스코틀랜드 프리메이슨단은 비천한 현직 석공들뿐만 아니라 영주들과도 긴밀한 연관이 있었던 것이 분 명하다. 이는 오늘날에도 스코틀랜드에서 여전히 자랑스럽게 지켜지는 전통이다. 크래프트는 곧 전 세계로 퍼진다.
제임스 2세파派를 지지하는 스코틀랜드 프리메이슨 단원들의 경향 및 아메리카와 프랑스 대혁명에 끼친 프리메이슨의 영향이 합쳐져서, 결국 잉글랜드 하노버 왕가의 왕들이 크래프트를 자신들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미합중국에서 독립선언이 이루어지고 4년 후인 1782년, 조지 3세의 형제 클래런스 공작이 그랜드 마스터가 된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해에 잉글랜드 왕자와 그의 두 형제들이 크래프트에 입문한다. 그리고 1년 내에 왕자는 그랜드 마스터가 되어, 그 당시 뉴욕 그랜드 로지 명부에 22번으로 이름이 오른 알렉산더 로지의 마스터, 조지 워싱턴을 비롯한 세계 전역의 메이슨들 및 많은 프랑스 로지들로부터 경하받는다. 이 방식으로 하노버 왕가의 왕들은 메이슨 체제를 이용하여 민주적으로 메이슨 국민의 충성심을 유지했다. 영국에 있는 메이슨단은 이제 사교적인 정찬 클럽이 되어가면서 그 원래의 유산에 대해 어버리기 시작했다. 그것의 진정한 비밀들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프리메이슨단의 확산
런던 그랜드 로지의 구성 직후, 제2 그랜드 마스터 조지 페인은 ‘고대 규정’ 복사본을 비롯한 메이슨의 주제에 대한 많은 원고들을 수집한다. 1720년 헌법서 발행이 결정되었고, 이때 수많은 귀중한 오래된 사본들/원고들이 일부 용의주도한 형제들에 의해 너무 성급하게 태워졌다고 주장된다. 이니고 존스의 고대 규정 원본의 사본이 이 지점에서 사라졌다고 주장된다. 같은 해에 앞으로 새로운 그랜드 마스터는 연례 모임 전에 임명되어야 하며, 취임된 모든 그랜드 마스터는 그의 대리인과 워든을 임명할 단독 권리를 가질 것이라고 동의된다. 1724년에 그 당시 그랜드 마스터인 리치먼드 공작은 형편이 어려운 메이슨들을 구제할 일반 기금을 모으기 위해, 최초의 자선 위원회를 조직한다. 이전에 그의 전임자 버클루 공작에 의해 제안된 바 있는 이 위원회는, 현대 프리메이슨단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자선활동에 대한 메이슨 조직 최초로 기록된 사례로 보인다.
1723년 1월 재직한지 단지 아홉 달 만에 몬태규 공작은 와튼 공작을 위해 그랜드 마스터직을 사임한다. 와튼 공작은 너무나도 그랜드 마스터가 되고 싶어 비정규 메이슨 모임에서 선출되고자 하기조차 했던 인물. 이제까지 마스터 메이슨은 가족들의 세습직이 되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었다. 초기의 그랜드 마스터였던 서민들은 다시는 그 직을, 심지어는 그랜드 마스터 대리인의 직도 가질 수 없다. 대리인은 낮은 계층의 귀족들이 맡아 그랜드 마스터의 관리 업무를 수행했다.
성장하는 조직은 제2의 관리 센터가 필요했고, 1727년 지방 그랜드 마스터 사무소가 설립되어 수적으로 증가하고 지리적으로 확장된 크래프트의 통제를 돕는다. 1727년 5월 10일, 휴 워버튼이 최초의 지방 그랜드 마스터가 되고, 그의 지역은 북웨일스가 된다. 그리고 1727년 6월 24일 에드워드 맨셀 바트 경이 남웨일스의 지방 그랜드 마스터로 임명된다. 1727년에 또한 해외 로지를 위한 최초의 위임장이 런던 그랜드 로지에 의해 (에스파냐) 지브롤터에 발행되고, 곧 마드리드 산 베르나르가에 있는 로지를 열 수 있는 허가가 난다.
프리메이슨단은 들불처럼 퍼졌고, 1728년에 이르러 런던 그랜드 로지는 조지 폼프렛에게 벵골에 로지를 세울 대리직을 준다. 크래프트의 지방 통제 범위는 로우어색소니와 미국의 뉴저지 그리고 벵골의 지방 그랜드 마스터들의 임명과 함께 확장된다. 1730년에 최초로 왕실혈통 공작이 입문하는데, 로렌 공작이자 토스카나 대공작으로 나중에 독일 황제가 된 프란치스가, 헤이그에서 소집된 특별 로지에서 체스터필드 백작에 의해 입문되었던 것. 공작은 메이슨의 첫 두 등급을 받았고, 나중에 다시 한 번 체스터필드 백작이 주관하는 로지에서 제3등급으로 오른다. 같은 해에 러시아와 스페인, 파리, 플랑드르에 로지를 설립할 대리직 수여로 해외 메이슨단의 범위가 좀 더 확장되게 된다.
이렇게 하여, 결사단은 급속도로 귀족들을 위한 정찬 클럽이 되어가고 있었다. 1730년 그들은 6월 24일에 햄스테드에서 최초의 런던 관할 국가 모임을 개최했는데, 이를 위해 초청장이 몇몇 귀족들에게 보내진다. 1733년까지 그랜드 로지의 연례 모임을 대표하는 53개의 로지들이 만들어져 런던 그랜드 로지의 세력과 영향력의 범위는 자라나고 있었다. 1733년 자선 위원회의 운영에 관한 몇몇 새로운 규정들이 승인되고, 같은 모임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메이슨들과 그들이 조지아에 새로운 식민지를 설립하도록 도울 기부금이 모금된다. 그해에 함부르크와 네덜란드에 로지를 여는 대리직 파견이 승인되고, 1738년에 제임스 앤더슨(그 당시 그랜드 세크리터리)이 개정 <규정서 Book of Constitutions>를 발행한다. 일부 저자들이 제임스가 크래프트 메이슨단을 창설했다고 여기게 한 것이 바로 크래프트 역사에 대한 이 작품이었다. 이때쯤 만일 로지가 열두 달 이상 모임을 갖지 않으면 목록에서 지워지고 그 순위를 잃게 된다는 규정이 도입된다. 또, 이 때 모든 미래의 그랜드 마스터들은 그랜드 스튜어즈 로지로부터 선출되어야 한다는 안이 결정되었다. 이는 불법 메이슨 집회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내려지는 동안, 단원들이 그 직책을 맡도록 고무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형제들이 마땅한 인물을 민주적으로 선출할 권리를 빼앗았다. 요크 그랜드 로지의 영토는 랭커셔와 더럼 그리고 노섬벌랜드에 있는 로지들의 인가로 침해되는데, 소문에 의하면 이로써 그 두 그랜드 로지들 간의 우호관계가 끝났다고 한다.
이때에 이르러 프랑스의 오비니와 리스본, 미국 남부 조지아 주의 사바나, 서아프리카의 갬베이에 로지를 세우도록 하는 위임장이 발행된다. 지방 그랜드 마스터들은 뉴잉글랜드와 사우스캐롤라이나 그리고 아프리카의 케이프코스트 캐슬로 임명되었다.
1738년에 두 지방, 카리브 해 섬들과 요크셔 지방의 웨스트 라이딩이 추가되는데, 이는 여전히 요크 그랜드 로지의 권리에 대한 또 다른 침해로 여겨졌다. 이로써 두 그랜드 로지 간의 불화는 더 깊어져,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게 된다. 1783년 8월 15일, 브런즈윅에서 열린 스코틀랜드 그랜드 로지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입문함으로써, 그랜드 로지들 간의 서열 씨움에서 중요한 승리를 이룬다. 프리드리히는 나아가 스코틀랜드 조직 아래에 베를린 그랜드 로지를 세운다.
미국 메이슨단의 발전
이렇게 크래프트의 기록된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어떤 면에서 우리의 연구는 완성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메리카의 별’ 의 땅의 장구한 운명이 너무나도 궁금했다.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우리는 미합중국의 발전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했다.
메이슨단이 미국 독립전쟁과 미합중국 설립의 주요 배후 세력이었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보스턴 티 파티’ (1773년 12월 16일 밤 미국 식민지의 주민들이 영국 본국으로부터의 차茶 수입을 저지하기 위해 일으켰던 사건)로 알려진 반反영국 세금 시위운동은, 사무엘 애덤스나 폴 리비어와 같은 유명한 인물들이 단원으로 있는 세인트 앤드루 로지의 단원들에 의해 1773년에 조직되었다. 보스턴의 그린 드래곤 여인숙에서 모였던 그 로지가 직접 그 ‘티 파티’ 를 조직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단원들이 Causus Pro Bono Publico라고 불리는 클럽을 만들었는데, 그 로지의 마스터인 조셉 워런(후에 매사추세츠의 그랜드 마스터가 된)이 이 클럽의 주요 세력이었다. 헨리 퍼켓은 구경꾼으로 ‘티 파티’ 에 참석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참석하는 것은 세인트 앤드루 로지의 마스터의 뜻에 어긋났다고 한다.
미합중국을 창설했던 자들은 프리메이슨들이었거나 프리메이슨 단원들과 긴밀한 관계가 있던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이전 세기에 영국에서 발전한 사고를 가지고 자신들 헌법의 골자들을 세웠다. 본인들이 느끼고 있지는 못했지만, 자신들의 새 나라를 위해 메이슨의 정의와 진리, 평등의 원칙에 충실함으로써, 그들은 재발견된 마트에 의해 운영될 땅의 건설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미국은 고대 이집트의 위대함의 진정한 후계자로서의 현대 국가로 태어난다. 어떤 면에서 미합중국의 건축자들은 성공을 이루었지만, 많은 측면에서 지금까지 그들은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남부 흑인들의 노예생활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끔찍한 독립전쟁이 일어났고, 오늘날에조차 많은 주에서 ‘평등’ 이라는 것은 분별 있는 사람들에게는 꿈이며,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는 무관한 단어일 뿐이니. 프리메이슨단처럼 미합중국은 노력해서 얻을 만한 가치가 있는 불완전한 이상이지만 그저 인간 군상이 모인 실패작이 되고 만다.
1778년 7월 4일에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자들 중 메이슨은 다음과 같다. 윌리엄 후퍼, 벤저민 프랭클린, 매튜 손튼, 윌리엄 위플, 존 핸콕, 필립 리빙스턴 그리고 토머스 넬슨. 여기에서 단 네 명만으로도 제3등급 메이슨 로지를 열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고 전해진다. 또, 대부분의 군 지휘관들에게도 메이슨 지위는 허락되었는데, 여기에서 지도 격 프리메이슨에 그린, 매리언, 설리번, 러퍼스, 퍼트남, 에드워즈, 잭슨, 기스트, 슈토이벤 남작, 캘브 남작, 라파예트 후작과 조지 워싱턴 자신이 포함되었다.
1789년 4월 30일 워싱턴의 공화국 첫 대통령 선서는 뉴욕 그랜드 마스터에 의한 것이었고, 워싱턴은 메이슨 성서에 대고 선서를 하게 된다. 성년 내내 프리메이슨이었던 워싱턴은 1752년 11월 4일 금요일 그의 21세 생일 다섯 달 전에 프레더릭스버그 메이슨 로지로 입문한다. 그의 본 로지가 매달 첫 금요일에 모였기에 그는 1753년 3월 3일에 제2등급을 통과했고, 같은 로지에서 1753년 8월 4일에 ‘최고의 등급’ 인 마스터 메이슨으로 등급했다. 워싱턴이 미합중국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을 때에 그는 거의 36년 동안 크래프트 단원이었고, 그 당시 제22번 알렉산드리아 로지의 단원이었다.
오래된 원고들을 조사하던 우리는 1792년 12월 27일 보스턴의 프리메이슨 단원들에 의해 헌정된 <규정서 Book of Constitutions>를 받은 뒤에 조지 위싱턴이 한 연설 기록을 발견했다. 수여 날짜로부터 우리는 이것이 그가 크래프트에 몸담은 지 40년 된 것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동료 시민들로부터 공공의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한 저의 노력을 입증받는 것은 너무나도 기쁘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또, 저의 미약한 덕행들이, 자유주의의 원칙들이 진리와 정의라는 불변의 법칙들 안에서 세워진 모임에 의해 높이 여겨졌음을 아는 것 또한 기쁩니다.
메이슨단의 목적은 행복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 즉 자선입니다. 그리고 이 우애단체의 단원들의 행동 원칙들을 담은 이 서적뿐만 아니라 그들의 행위가, 인류에게 메이슨단의 위대한 목표는 인류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제게 주신 <규정서>와 헌정식에서 저에게 보여주신 경의에 대한 저의 감사를 받아주십사 하면서, 그대들의 애정 어린 인사말과 진심에서 우러난 바람들에 진정으로 감사함을 분명히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또, 저는 우주의 위대한 건축가에게 여기 계신 당신들을 축복하며, 내세에 그의 불멸의 성전에 그대들을 받아줄 것을 진심으로 기도하는 바입니다.’
또, 1792년 위싱턴은 백악관의 주춧돌을 놓는다. 바로 드 몰레가 십자가에 달린 기념일인 10월 13일에 말이다!
그해에 달러가 미합중국의 통화 단위로서 채택되는데, 달러의 표시는 세로로 두 줄이 그어진 ‘ 다. 즉 S 는 오래된 스페인 주화에서 차용되었지만, 2개의 세로선은 미합중국의 메이슨 창설자들에게 ‘보아스’와 ‘야긴’ 으로 알려진, 솔로몬 왕 성전 입구의 기둥인 나사렛인들의 기둥 ‘mishpat’ 과 ‘tsedeq’ 였다.
오늘날 달러지폐에는 하나의 눈이 자리 잡은 피라미드의 이미지가 들어 있는데, 이것은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모든 이미지들 중 가장 오래된 것 이다. 유대인들의 바빌론 유수 동안 선지자 에스겔에 의해 행해진 왕 즉위식에서 제거된 이집트 문양들로부터 살아남아, 세케넨레 타오 시대 전부터 전해 내려져 온 것이니 말이다. 그것은 항상 존재하는 눈을 가진 신(아멘-레 의 형태를 띤)을 의미하는데, 그의 시선은 백성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심판하기 위해 백성들을 향해 있고, 그에 따라 그들은 죽어서 정당한 대가를 받을 것이다. 신에 의한 선善의 측정은 바로 마트의 기초다. 1달러 지폐의 앞면에는 형제 조지 워싱턴이 있고, 지금은 사라진 2달러 지폐에는 또 다른 유명한 프리메이슨 형제인 벤저민 프랭클린의 이미지가 있었다.
1793년 9월 18일 워싱턴 국회의사당의 정초식을 올린 조지 워싱턴은 동료들과 함께 메이슨 의복으로 성장盛裝했다.
미합중국은 역사가 매우 짧은 젊은 국가다. 고대 이집트의 장수에 맞추기 위해서는 적어도 서기 4500년까지 강력한 지위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 최초의 위대한 정점과 맞추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400년은 더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서쪽 바다 건너 그 세계주의의 땅에 집을 세웠던 메이슨의 실험이 휠씬 위대한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적어도 6천 년 전에 남부 이라크에서 시작된 여행에 있어서의 유일한 또 하나의 디딤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