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은 어디에서 왔는가

일본인의 기원에 대한 네 가지 주요 이론

  1. 빙하기 유입 및 구석기 시대부터의 연속성
    1. 대부분의 일본인은 일본인의 기원이 약 20,000년 전 빙하기 동안 일본에 유입된 구석기 인류로부터 유래했다는 견해를 취한다.
      이들은 조몬(Jomon) 문화의 토착민들로, 조몬 시대(약 13,000년 전부터 기원전 300년까지)의 일본은 토착민들이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킨 시기입니다. 조몬 문화는 독특한 도자기 제작 기술과 농업을 포함하지 않는 수렵 채집 경제로 특징지어집니다.
  2. 기마민족 정복 이론
    1. AD 4세기경 중앙아시아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기마민족이 한국을 거쳐 일본을 정복하면서 그 후손이 현재의 일본인이 되었다는 이론입니다. 이 이론대로라면 그들은 결코 한국인이 아니다.
  3. 벼농사 이주 이론
    1. 반면 서구의 많은 고고학자와 한국 학자들은 일본인이 기원전 400년경 한국에서 벼농사와 함께 이주해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이론을 선호합니다.
    2. 이 이론은 일본과 한국 간의 유전자 및 문화적 유사성을 강조합니다.
    3. 야요이(Yayoi) 문화는 한국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벼농사와 철기 기술의 도입이 이루어졌습니다. 야요이 시대(기원전 300년에서 기원후 300년)는 조몬 문화와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새로운 문화가 일본 열도에 등장한 시기로, 한국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4. 혼합 기원 이론
    1. 마지막으로 위의 세 가지 이론에서 언급된 모든 사람들이 서로 혼합되어 오늘날의 일본인이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조몬인, 야요이인, 그리고 기마민족 등 다양한 문화적, 유전적 요소들이 혼합되어 현재의 일본 인구를 형성했다는 것입니다.

일본 고대사의 신화

일본의 고대 연대기는 창조신화와 역사적 사실이 혼재된 상태입니다. 1946년까지 일본의 학교에서는 AD 712년과 AD 720년에 쓰인 연대기를 기반으로 하는 일본사의 신화를 가르쳤다. 이 연대기에는 창조신 이자나기의 왼쪽 눈에서 태어난 태양신 아마테라스가 손자인 니니기를 일본 규슈지방에 내려보내 지상의 신과 결혼시켰다는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니니기의 증손자인 진무가 신성한 새의 도움으로 적을 무력화하고 BC 660년일본의 첫 번째 왕이 되었다고 전합니다.
이 bc660년이라는 연도와 일본왕실이 등장한 최초의 역사적 기록 사이의 차이를 메우기 위해, 연대기는 13명의 가공의 왕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고고학적 증거

일본에서 고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유적으로 AD 300년에서 AD 686년 사이에 세워진 158개의 거대한 고분군이 있습니다. 일본의 고대왕가와 왕실의 유물이 보존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이 유적지는 여전히 왕실 유물 관리소의 소유로 남아 있으며, 고분을 조사하는 것은 신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이유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일본왕실의 기원을 연구하는 것 또한 부정적일 수 밖에 없다. 이는 일본 왕실의 기원이 한국일 가능성에 대한 연구를 방해합니다.

미국에서는 그들의 선조가 오늘날의 미국인과 관련이 없다고 고고학적 결론을 내리지만, 일본에서는 어찌되었건 옛 조상이 오늘날의 일본인으로 이어졌다고 믿는다.

일본과 한국의 교류

AD 300~700년 동안 일본과 한국 사이에는 활발한 인적, 물적 교류가 있었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풍부합니다. 그러나 이 증거를 해석하는 방식은 일본과 한국 간에 차이가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이를 두고 일본이 한국을 점령했다는 증거로 해석하며, 한국에서 노예와 장인을 보내왔다는 주장을 합니다. 반면, 한국에서는 한국이 일본을 점령했고, 일본 왕실을 세운 이들이 한국인이라고 주장합니다.

지리적 조건은 한국인들이 일본문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했다. 수천년동안 한국은 일본에 아시아대륙의 작물, 가축, 식량생산방법과 문화를 전달하는 주요 통로가 되어왔다.

에다후나야마 검

역사서가 쓰이기 이전의 일본을 대표하는 유명한 유물이 있다. 도쿄 국립박물관에 국보로 소장되어있는
에다후나야마 검은 AD 5세기 무렵의 유물로, 은으로 장식된 이 철제 검에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문장 중 하나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문장은 위대한 왕과 신하, 그리고 초안이라는 이름의 한국인을 언급합니다. 문장은 마모되고 유실되어 완전하지 못하며 대부분의 의미를 추측해야만 한다.
일본 학자들은 유실된 글자가 8세기에 쓰인 일본 연대기에 기록된 미즈하와케 왕을 뜻한다고 풀이하지만, 1966년 한국의 역사학자 김석형은 유실된 글자 속 이름이 사실은 한국의 개로왕이고, 이름이 기록된 신하는 일본의 일부를 점령한 한국의 봉신이라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과연 무엇이 상고시대의 합당한 질서란 말인가?


일본인의 조상은 누구인가?

생물학, 언어학, 역사적 기록, 고대 초상화 등을 통해 통해 살펴보자. 일본은 서남쪽에서 북동쪽으로 이어지는 규슈, 시코쿠, 혼슈 그리고 홋카이도의 네개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생물학적 관점

아이누족과 일본인의 유전자

19세기에 다수의 일본인들이 이주하기 전까지, 홋카이도와 북부 혼슈는 역사적으로 아이누족이 주로 거주하던 지역이었다. 아이누족은 일본인이 다른 세개 섬에 모여살때, 주로 수렵 채집 생활을 하면서 제한적으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일본인은 유전자와 두개골 형태 뿐만 아니라 외모까지 다른 동아시아 지역, 즉 중국 북부와 시베리아 동부, 특히 한국에 사는 사람들과 매우 유사합니다.

  • 아이누족
    • 유전자와 외모: 아이누족 남자들은 누구나 덥수룩한 턱수염이 나며, 몸에도 털이 굉장히 많다. 아이누족은 지문이나 귓밥의 형태 등 여러 유전적 형질을 고려할때,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일본에 정착한 캅카스 인종(보통은 백인을 말함)에 속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 유전자 조합: 그러나 아이누족의 전반적인 유전자 조합을 보면, 다른 동아시아 사람들이나, 한국인, 일본인, 오키나와인과의 관련성도 나타납니다. 아마도 그들의 독특한 외모는 아시아 본토로부터 이주해 열도 안에 고립된 후, 자웅선택을 하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매우 적어진 유전자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 독특한 외모와 수렵채집 생활 방식때문에 아이누족은 종종 고대 일본에서 수렵채집생활을 하던 이들의 후손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 설에 따르면 일본인은 좀 더 최근에 와서야 아시아 본토로부터 유입되었다는 것이다.

언어학적 관점

  • 알타이어족: 일본어와 한국어는 대개 아시아의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고립어로 간주됩니다. 그러나 일본어와 한국어 사이에 나타나는 유사성은, 보다 상세하게 공유하는 문법이라든가 어휘의 유사성과 같은 차원이 아니라, 일반 문법체계와 기본어휘를 약 15%정도 공유하는데 그친다.
  • 언어적 관계: 만약 일본어와 한국어가 정말로 관계가 깊다고 한다면, 15%뿐인 공유 어휘는 이 두 언어가 약 5000년 전에 서로 분리되기 시작했음을 시사합니다.
  • 아이누어: 아이누어는 일본어와 어떤 특별한 관계도 없어 보입니다.

고대 초상화와 유물

생물학, 언어학적 고찰에 이어, 일본인의 기원에 관한 세번째 증거로 고대의 초상을 들 수 있다. 일본 정착자들의 외모를 유추할만한 가장 초기의 유물은 1500년 된 무덤들 주위에 서있는 하니와(일본에서 고분시대부터 무덤 위와 주위에 놓아둔 토용)라 불리는 입상들이다.

  • 하니와 입상
    • 하니와는 1500년 된 무덤 주위에 서 있는 토용으로, 고대 일본 정착자들의 외모를 유추하는 데 중요한 자료입니다.
      특히 눈 모양을 볼때, 현대 일본인이나 한국인과 같은 동아시아인의 특징을 보이며, 턱수염이 덥수룩한 아이누인과는 닮지 않았습니다.
      만약 일본인이 홋카이도 남부까지 아이누인을 대체해 살게 된 것이라면, 이는 AD 500년 이전에는 이뤄졌어야 한다.

1615년 일본인은 홋카이도에 무역 거점을 세웠고, 그 후로 그들은 백인 미국인이 인디언 원주민에게 했던 방식 그대로 홋카이도의 아이누인을 상대했다. 아이누인을 정복하고, 보호구역에 몰아넣고, 무역거점에서 일하도록 종용했으며, 일본인 식량생산자를 위해 땅을 빼앗았다.
일본이 1869년 홋카이도를 점령했을 때, 일본인 선생들은 아이누 문화와 언어를 말살하기로 결의했다. 오늘날 아이누어는 실제로 소멸해버렸으며, 아마 순수 아이누인도 없을 것이다.

역사적 기록

  • 중국 연대기:
    • – 일본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중국 연대기에서 발견됩니다. 중국은 이미 오래전부터 한국과 일본에 전해진 문자를 발전시켜왔기 때문이다.
      중국은 BC 108년에서 AD 313년까지 한반도 북부 지방을 점령했고, 일본과 사절을 교환했습니다.
      그 결과 중국인들은 주위 여러 민족을 ‘동이’로 불렀으며, 일본은 왜(倭)라는 이름으로 표기했다.
      당시 왜는 100여개의 소국으로 나뉘어 전쟁을 일삼고 있었다.
  • 일본과 한국 연대기:
    • AD 700년 이전에는 일본과 한국인에 대한 기록이 극히 일부만 보존되어 있으나, AD 712년과 720년,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연대기를 작성했고, 한국도 뒤를 이었다.
      일본과 한국의 연대기를 들춰보면 초기 역사를 복원한 초기에는 지배 가문의 영화와 통치를 위해 열심히 사실을 조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왕을 태양신 아마테라스의 후손으로 설명하는 식이다.
      그럼에도 연대기에는 한국 자체의 문화와 한국을 통한 중국 문화가 일본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음이 명확히 드러난다.
      불교가 도입되고, 글을 쓰게 되었으며, 여러 기술과 관료제가 일본에 유입된 것이다.
      연대기에는 일본에 사는 한국인, 한국에 사는 일본인에 대한 설명도 있다.

일본의 토기가 불러일으킨 충격

지금까지 우리는 문자로 기록을 남기기 이전 시대의, 일본에 도착한 일본인의 조상에 관해 살펴보았다.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보면 최근에 정착했을거란 생각이 들지만, 언어를 보면 적어도 5000년 전일 것이라는 논의도 했다.
오늘날 일본과 동아시아 해안가는 얕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그러므로 빙하기에는 마른육지였을테고, 바닷물은 빙하 속에 갇혀 수위는 현재보다 약 150m아래였을 것이다.

빙하기와 일본의 지리적 변화

빙하기의 지형

그 시기 일본 최북단 섬 홋카이도는 사할린을 통해 러시아 본토와 연결되었고, 규슈는 한반도 남쪽을 오늘날의 대한해협을 통해 다른 섬과 이어주는 다리였습니다.
일본의 모든 섬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고, 지금의 황해와 동중국해는 중국 본토까지 육지로 확장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매머드나 현재 일본의 곰이나 원숭이의 조상 같은 동물들과 함께 고대 인류의 조상도 다리처럼 이어진 육지를 통해 일본으로 이주할 수 있었습니다.
석기는 50만년 전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일본 북부 지방의 석기는 시베리아와 중국 북부지방의 석기와 유사하고, 남부 지방의 석기는 한국과 중국 남부지방의 석기와 닮았습니다.
이는 일본 북쪽과 남쪽에 걸친 두개의 다리가 모두 인류의 이동 경로로 사용되었음을 시사합니다.

빙하기의 일본은 춥고 메말라, 인간이 먹고 살만한 작물이라곤 하나도 없는 수풀투성이 땅이었다. 빙하기의 일본인들은 이런 환경을 개척하며 성숙해졌습니다.
약 3만 년 전, 일본인들은 뗀석기 대신 날카로운 간석기를 발전시킨 최초의 인류중 한 무리였다. 영국 고고학계에서는 간석기의 발명이야말로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향하는 중요한 문화적 진보를 낳은 수단이라 설명하는데, 그런 석기는 영국에서 식량생산문화가 시작하던 7000여년 전까지 찾아볼 수 없었다.

기후 변화

약 1만3천 년 전, 빙하기가 끝나면서 전 세계의 빙하가 급속도로 녹기 시작했고, 일본도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변했습니다.
기후와 강수량, 습도가 증가하며 작물의 생산성도 오늘날의 일본 수준으로 높아졌습니다.
빙하기 때 일본 남부 지방에만 분포했던 견과류를 맺는 낙엽수는 북부 침엽수림이 있던 곳까지 영역을 넓혔다. 인간에게 유용한 생산적인 산림으로 변한 것이다.
높아진 해수면은 육지로 이어진 다리를 덮어버려서, 이제까지 땅이었던 곳은 얕은 바다가 되었다. 일본은 이제 아시아 대륙의 일부에서 거대한 군도로 탈바꿈한 것이다. 해안가에는 수많은 섬과 만, 간석지가 드러났으며, 바다에는 온갖 먹거리로 넘쳐나게 되었다.


토기의 발명과 그 중요성

빙하기가 끝난 후, 일본에는 일본 역사상 가장 중대한 두 가지 변화 중 첫 번째 변화가 도래한다. 바로 토기의 발명이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사람들은 이제 물을 담을 그릇을 갖게 되었고 원하는 대로 마음껏 빚어내게 되었다. 음식을 끓이거나 삶는 등의 조리법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이전에는 먹기 힘들었던 다양한 식재료를 향유하게 되었다. 불에 직접 익히면 타거나 말라버려 먹을 수 없었던 채소, 쉽게 입을 벌리지 않던 조개, 독이 있거나 씁쓸하지만 영양가 높은 도토리 등을 데쳐서 먹기 좋게 만들었다.

아이들은 끓여서 부드럽게 된 음식을 먹으며 좀더 일찍 젖을 떼게 되었고, 따라서 출산 주기도 짧아졌다.
문자가 없던 시절, 정보의 지식 창고였던 이 없는 노인들은 이제 생을 연장할 수 있게 되었다.
토기가 촉발시킨 이 모든 결과로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었고. 일본의 인구는 몇천 명 수준에서 25만 명 정도로 급증했습니다.

일본의 토기와 그 역사적 의미

당연한 말이겠지만, 일본인들이 토기를 만들어 쓴 유일한 고대인은 아니었다. 토기는 그 옛날, 인류가 다양한 시기와 장소에서 독자적으로발명한 유산이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토기는 약 1만2천7백년 전에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60년 이 발견이 발표되었을 때 일본 과학자들조차 이를 믿기 어려워했습니다.

일본 고고학자들은 토기의 발명이 중국이 아닌 일본에서 시작된 것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섬나라 사람들의 문화는 그 수준이 우월한 대륙으로부터 학습된 결과라는 편견이 있었지만, 일본의 토기 발명은 이러한 편견을 뒤집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토기는 본토 대륙에서 발명되어 섬으로 전파되는 것으로 여겨졌지, 주변부에 자리한 작은 사회가 세계 전역을 혁명적으로 진보시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일본 고고학자들의 경험으로만 봐도, 동아시아에서 문화적 충격을 줄 원천은 중국이어야 했다. 식량 생산이 그랬으며, 문자가 그랬다. 금속을 다루는 기술이라든가 기타 중요한 모든 발명은 중국에서 나왔다.
– 당시 고고학자들은 토기의 발명을 본토 대륙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했지만, 일본에서의 발견은 이러한 기존 견해를 뒤흔드는 사건이었습니다.

일본에서 최초의 토기가 출토된 지 40년이 흘렀지만, 고고학자들은 아직도 탄소 14 연대 측정의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것을 제외하면 다른 초기 토기들은 중국이나 러시아 동부 블라디보스토크 부근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토기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나 유럽의 것보다 1000년이나 오래된 것이고,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토기가 불러일으킨 충격

일본에서 최초로 생산된 토기는 확실히 수렵 채집민의 유산으로, 이 또한 정주 생활을 하는 사회에서만 토기가 발생한다는 기존의 견해를 뒤흔드는 일이었습니다. 유목민들은 이동 시 아기와 무기를 챙겨야 하므로 무거운 토기를 사용하지 않는데, 따라서 수렵 채집민은 대개 토기를 쓰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정주 문화권은 식량 생산을 채택한 지역 외에는 없다.
그러나 일본의 자연환경은 너무나 풍요로웠고, 사람들이 정착해 토기를 만들어 쓴 곳은 일부에 지나지 않을 뿐, 여전히 생활의 중점은 수렵 채집이었다. 집약적인 농경을 시작하기 전, 일본인들은 토기가 있었기에 1만여 년이 넘게 보다 많은 식량을 얻기 위해 자연을 활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비옥한 초승달 지대 에서는 농경을 시작하고 나서 1000여 년이 흐르기 전까지 토기를 쓰지 않았다.

조몬 시대

고대 일본인이 만든 토기는 기술적으로 단순했습니다. 바퀴가 아닌 손으로 만들고, 가마가 아닌 야외에서 구워졌으며, 상대적으로 낮은 온도의 불에서 구워졌기 때문에 매끄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각 시대의 표준에 맞는 여러 예술적 형태의 토기를 빚을 수 있었습니다. 토기가 굳기 전에 진흙 위에 새끼줄을 굴리거나 눌러 장식을 낸 스타일도 나타났습니다. 일본인들은 이를 두고 ‘새끼줄 무늬’ 라는 뜻의 ‘조몬’ 이라 부르는데, 이 용어는 후일 토기뿐만 아니라. 토기를 만든 옛 일본인들과 토기를 발명한 시기부터 소멸한 약 1만 년후까지의 시기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최초의 조몬 토기는 1만 2천7백년 전 일본 남단의 섬 규슈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이후 토기는 북쪽으로 전파되어 약 9500년 전 도쿄 일대에 퍼졌고, 최북단 홋카이도에는 약 7000년 전에 도달했습니다. 토기의 북상 과정은 견과류가 풍부한 낙엽수의 북상과 시기를 같이하는데, 식량이 많아지면서 정주 생활과 토기 사용의 증가로 이어졌다는 가정이 가능하다.
일본 남부에서 발명된 토기와 그 전파 초기 조몬 토기의 형태는 일본 전역에서 꽤 통일된 형태를 취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역 특색이 반영된 10여 가지의 토기 형태가 일본 열도 2400km에 걸쳐 발전했습니다.


수렵 채집을 했는데도 인구밀도가 높았던 조몬인

조몬인의 생활 방식과 식량 자원

조몬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그들이 남긴 수천 개의 유적지에서 발견된 쓰레기 더미와 일본 전역에 흩어져 있는 거대한 조개더미 유적을 통해 그들의 생활 방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조몬인들은 사냥, 채집, 낚시를 통해 다양하고 균형잡힌 식생활을 영위했으며, 견과류가 주식이었습니다. 특히 씁쓸한 맛을 제거한 밤, 호두, 도토리, 침엽수 열매 등을 많이 먹었습니다. 가을이면 상당한 양의 견과류를 수확할 수 있었는데, 겨울을 나기 위해 2m 너비에 2m 깊이의 땅을 파 저장했습니다. 또한 딸기류, 과일, 씨, 나물, 구근, 새순, 뿌리 등 다양한 식물을 섭취했습니다. 고고학자들이 조몬 시대 쓰레기 더미에서 찾은 식용식물은 총 64종에 달합니다.

해산물과 육류 자원

현대 일본인들처럼 조몬인들도 해산물을 많이 소비했습니다. 조몬 시대에도 원양어업으로 참치를 잡았고, 돌고래를 얕은 바다로 유인해 곤봉으로 때려잡거나 작살로 잡았으며, 물개를 해안가에서 사냥했습니다. 연어는 산란기에 강으로 올라올 때 수확했으며, 어망을 이용해 다양한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사슴뿔을 깎아 만든 낚싯바늘도 썼다. 조개나 게, 해조류는 내륙에서 채집하거나 잠수를 해 채집했다. 조몬인들의 두개골에는 외이도 외골증이라는 병이 자주 발견 되는데, 이는 오늘날의 잠수부들에게서 종종 나타나는 귓속뼈의 이상 성장으로 발생하는 병리학적 현상으로, 이들이 해산물 채집을 위해 잠수를 많이 했음을 시사합니다.

육류 자원으로는 야생 멧돼지, 사슴, 산양, 곰 등이 주요 사냥감이었습니다. 구덩이를 파서 함정을 만들거나, 활을 쏘거나 사냥개를 풀어서 사냥했습니다. 조몬 시대의 돼지 뼈는 주로 해안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는데, 그곳은 돼지가 자생하는 곳이 아니어서 조몬인이 돼지를 가축으로 사육하는 실험을 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식량 생산과 정주 생활

조몬인들이 식량 생산에 기여했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습니다. 조몬 유적지에는 종종 일본에서 야생 상태로 자생하는 식용식물의 잔해가 발견된다. 이것들은 오늘날에도 수확 할 수 있는 것으로서 팔, 녹두, 기장 등이다. 조몬 시대 유적에서 발견된 곡식들은 형태가 온전히 남아 있지 않아, 야생에서 채집한 것인지 의도적으로 기른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유적지에는 일본 자생종은 아니지만 식용 가능하고 유용한 식물 종자도 발견된다. 메밀, 참외, 호리병박, 대마, 시소 등인데, 아시아 본토에서 그 가치를 소개하기 위해 전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B.C. 1200년경, 조몬 시대 말기 즈음에서 쌀, 보리, 조, 수수 등의 재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조몬인들이 화전을 시작했음을 시사하지만, 주요 경작 방식은 아니었습니다.

지금껏 언급한 음식 모두는 조몬 시대 일본 전역에서 실제 먹던 것이다. 그렇지만 견과류가 풍부한 일본 북부의 산림에서는 물개 사냥과 낚시, 구덩이에 저장하던 견과류가 중요했습니다. 견과류가 부족한 남서부 지방에서는 조개가 중요한 식량원이었습니다.
이렇듯 지역에 따른 차이가 있다고는 해도 조몬 사회에서 다양한 먹거리를 향유한 것은 사실이고, 조몬인 개개인의 식단 또한 다채로웠다. 예를 들어 조몬인들은 음식이 남으면 이를 보존해, 밤과 호두 가루, 사슴 고기나 피, 다양한 종류의 새알 등을 섞어, 오늘날로 치면 고단백 쿠키나 햄버거 같은 요리를 만들어 먹었다. 최근까지 수렵 채집 생활을 하던 아이누족도 질그릇에 물을 끓여, 온갓 종류의 식품을 넣어 섞어 먹었다. 어쩌면 조몬인의 후예가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삶을 영위해왔는지도 모른다.

조몬인의 주거와 사회 구조

조몬인은 토기(길이가 1m나 되는 크고 무거운 토기도 포함)를 사용하면서, 수렵 채집을 하던 유목 생활에서 정주 생활로 바뀌게 되었다고 언급했었다.
그들이 정주 생활을 했다는 다른 증거로는 무거운 석기, 수리의 흔적이 보이는 반지하 주거지, 백여 명이 넘는 주민이 살던 주거 단지, 묘지 등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수렵 채집민은 몇 주마다 한번씩 주거지를 이동한다. 따라서 아주 간단한 형태의 집을 짓고, 이동할 때는 쉽게 가져갈 수 있는 물품만 남기고 모두 태위버리는 삶을 반복한다. 이는 유적지에서 발견된 증거로 밝혀진 조몬식 생활양식과 매우 다른 모습이다.
조몬인들은 중심지로부터 짧은 거리 내에 풍부한 자원을 제공하는 내륙 삼림, 강, 해안, 만, 대양 등 각종 동식물들의 서식지들이 다양하게 존재했기 때문에 정주 생활이 가능했습니다.
조몬 사회는 수렵 채집민 중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인구밀도가 높았으며, 특히 견과류가 풍부한 숲과 연어가 많은 강이 있고, 먹을 것이 많았던 바다가 있던 일본 중부와 북부 지역에 집중되었습니다.
조몬 시대 일본인은 대략 25만 명을 헤아린다고 하는데, 이는 오늘날의 일본과 비교하면 물론 적은 수치지만, 수렵 채집을 하던 시대라는 점을 김안하면 놀라울 정도다. 오늘날 조몬인과 가장 비슷하게 생활하는 사람들은 태평양에 면한 캘리포니아 북서부 해안가에 사는 미국 인디언인데, 견과류가 풍부한 숲이나 연어의 회귀천, 먹을 것 많은 바다가 생활 터전이라는 점에서 흡사하다. 아마도 인간 사회의 수렴적 진화를 여실히 드러내는 사례가 아닐까 싶다.

조몬 시대의 한계

조몬인들은 집약 농경을 하지 못하고, 미숙한 시도를 해보는 데 그쳤습니다. 개를(미심쩍지만 돼지도) 기르지 않았으며, 가축이 없었고, 금속 도구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문자가 없었습니다. 옷감을 짜지 않았고, 조몬인이 살던 마을과 무덤가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집이나 무덤도 없었습니다. 사회 계층은 아주 미미하게 분화되었으며, 족장이나 지도자가 없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일본에서 불과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중국 본토와 한국의 당시 상황과 대조적이었고, 그리하여 일본은 B.C. 400년 이후 대변혁의 물결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외부와의 교류와 영향

당시의 동아시아 사회에서 독특한 특징을 보인 일본의 조몬 시대지만, 완벽하게 고립되어 있던 것은 아니다. 토기와 흑요석의 전파를 보면 조몬의 수상생활 도구가 현재의 도쿄에서 300km 남쪽으로 떨어진 이즈 섬까지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조몬인은 토기, 흑요석, 낚싯바늘을 이미 앞에서도 언급한 아시아 본토산 곡물 대여섯 가지가 교환되었던 것과 유사하게 한국과 러시아, 오키나와와 교환했다.

조몬 일본을 연구하는 고고학자들이 조몬인이 중국에서 직접 수입을 했다는 증거를 발견한 적은 별로 없지만, 그 후로 전개된 일본사에 중국이 끼친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 후세대와 비교할 때 조몬 일본이 갖는 의의는 그들이 외부 세계와 어떤 접촉을 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오히려 조몬 사회에 외부 세계가 끼친 영향이 매우 적다는 데 있다. 조몬 일본은 외부와 차단되어 1만 년이란 시간 동안 놀라울 정도로 변화가 없었습니다. 너무도 쉽고 급격하게 변하던 당시 세계에서, 안정을 지켜낸 하나의 섬이었던 것이다.

그 당시의 관점에서 조몬 사회의 특이점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일본에서 서쪽으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아시아 본토의 사회가 어떠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B.C. 400년경, 조몬의 생활양식이 막바지로 치닫던 때로 돌아가보자. 당시 중국은 부유한 엘리트 계층과 가난한 평민으로 이루어진 여러 왕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취락은 성벽으로 둘러씨여 있었고, 막 정치적인 통일을 이뤄 세계에서 가장 넓은 제국을 형성하려던 무렵이었다. B.C. 7500년 초엽 중국 북부에서는 기장을, 남부에서는 벼를 기반으로 한 집약 농경이 발전했고, 돼지와 닭, 물소 등도 사육했다. 그때 중국은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이미 900년이 지난 후였으며, 금속 도구를 쓴 지도 1500년이나 된 무럽이었다. 더군다나 그 즈음에 세계에서 가장 먼저 무쇠를 생산하는 방법을 고안하기도 했다. 중국의 발전된 문물은 한국으로 전파되었는데, 한국 역시 이미 수천 년 전부터 농사를 지었고(벼농사는 B.C. 2200년경부터 시작), B.C. 1000 년경부터는 금속을 사용했다.
대한해협과 동중국해 너머에서 수천 년을 이어온 이러한 발전상을 고려할 때, 한국과 일부 교역을 하긴 했으나 아직도 문자를 알지 못하 고 석기를 쓰면서 수렵 채집을 하던 일본의 사정은 도무지 납득할 수 가 없다. 인간 역사를 통틀어 금속 무기와 군대로 무장하고 농익은 농경문화로 뒷받침된 중심 국가는 수렵 채집을 하며 석기나 쓰는 뒤떨어진 족속을 말살하게 마련인데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조몬인들은 그토록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일까?

조몬인의 생존과 변혁

이 모순에 대한 답을 이해하려면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B.C. 400년이 될 때까지 대한해협 연안에 살던 농사꾼들은 수렵 채집 민들보다 부유하기는커녕 오히려 가난했던 것이다. 또한 중국은 조몬인들과 직접 교역을 하지 않았다. 조몬이 중국과 교역을 할 때는 늘 한국을 통했다. 한편 따뜻한 중국 남부 지방에서 기르던 벼는 그보다 훨씬 서늘한 한국을 향해 천천히 북상하며 전파되었다. 이삭이 추위에 적응하도록 개량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한국의 초창기 벼놓사는 물을 댄 논이 아니라 마른땅에서 했으며, 결과적으로 한국의 초기 농업 생산량은 조몬의 수렵 채집에 견줄 바가 못 되었다. 조몬인들은 그러한 현실을 알면 알수록 한국의 농업을 받아들여야 할 어떤 매력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의 가난한 식량 생산자들 역시 굳이 농사를 일본에 전파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몬인의 풍요로운 생활은 급작스럽고 극적인 변화를 겪게 됩니다.


한반도에서 전래한 생활양식이 일으킨 변화

조몬 시대와 야요이 시대의 전환

  • 첫 번째 변화: 1만2천 년경 규슈에서 토기가 발명되며 조몬인들이 급격히 증가함.
  • 두 번째 변화: 야요이 시대의 도래
    • B.C. 400년경 한반도 남부로부터 도래한 새로운 생활양식(사람들도 도래했을지도 모른다)과 함께 두 번째 인구 폭발이 발생함. 이는 일본인의 기원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킴.
    • 조몬인 대체 가능성: 과연 조몬인은 한반도 이주민으로 대체된 것일까? 아니면 일본 원주민인 조몬인이 그대로 일본 사회를 지배하면서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인 것에 불과할까?

새로운 생활양식의 도입

새로운 생활양식은 일본의 남서부 끝자락에 위치한 규슈의 북쪽 해안에서 처음 나타났다. 이곳은 한국과 대한해협을 두고 바로 맞닿아 있는 곳이다.

  • 주요 요소:
    • 철기 사용: 일본에서 처음으로 철기가 사용됨.
    • 농경문화 확립: 물을 댄 논에서 벼를 경작, 수로와 댐, 제방 등 관개 시설 구축.
    • 고고학적 증거: 벼의 잔유물이 출토됨.
    • 야요이 문화: 1884년 도쿄 지구에서 처음으로 특유의 토기를 확인한 후, 이 새로운 생활양식을 ‘야요이’ 문화로 명명함. 조몬 토기와 달리 야요이 토기는 동시대의 한국산 토기와 매우 유사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야요이 문화의 많은 요소는 확실히 한국적이었으며 일본의 이전 시대와 상당히 동떨어진 것이었다.
    • 한국적 요소: 동제 물품, 직조 기술, 유리 구슬, 땅에 묻는 쌀 저장 항아리, 죽은 사람을 독에 넣어 묻는 풍습, 한국식 도구와 집 등이 포함됨.

야요이 시대의 특징

  • 주요 산물: 벼 외에도 일본에 처음으로 소개된 27종의 곡류 도입, 완벽히 가축화된 돼지.
  • 농업 방식: 여름에는 물을 댄 논에서 벼농사, 겨울에는 마른 땅에서 기장, 보리, 밀 등을 재배하는 이모작.
  • 인구 증가: 집약 농경 체제의 높은 수확량으로 규슈 지방에서 급격한 인구 증가 발생.
  • 고고학적 증거: 조몬 시대가 야요이 시대보다 열네 배나 길게 지속되었지만, 고고학자들은 규슈 지방에서 야요이 유적지를 휠씬 더 많이 발굴했다.

야요이 문화의 급격한 발전

야요이 문화의 확산

야요이 농경문화는 즉각적으로 규슈와 인접한 주요 섬인 시코쿠와 혼슈로 전파되었습니다. 도쿄 지역에는 약 200년 만에, 규슈에서 1600km 떨어진 혼슈의 최북단에는 약 300년 만에 도달했습니다. 규슈에서 발견된 초기 야요이 유적지에서는 야요이 토기와 함께 조몬 토기도 발견되었습니다. 조몬 토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사라졌지만, 조몬 문화의 기초를 이룬 몇 가지 특징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문화적 혼합

  • 농기구: 야요이 시대 식량 생산자들은, 한국과 중국에서는 이미 완전히 금속으로 교체된 농기구를 조몬인들이 사용하던 뗀석기로 계속 사용했다.
  • 주거 형태: 일부 집은 한국식으로, 일부는 조몬식으로 지어졌습니다.
  • 문화적 융합: 특히 야요이 문화가 당시 가장 많은 인구가 밀집한 도쿄 북쪽, 즉 벼를 재배하기엔 다소 날씨가 추운, 수렵 채집을 하던 조몬인들이 살던 지역까지 퍼지면서 야요이와 조몬이 섞인 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금속 재질의 조몬식 낚싯바늘, 변형된 야요이 양식에 조몬식 무늬가 새겨진 그릇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추운 혼슈 북단을 손쉽게 점령한 뒤, 야요이 식량 생산자들은 그 지역을 떠났다. 아마도 벼농사가 조몬 수렵 채집민의 생활 방식과 비교해 경쟁력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후로 2000년간, 혼슈 북부 지방은 황무지로 인식되었다. 일본 최북단에 위치한 홋카이도와 그곳에 살고 있던 아이누인은 19세기에 편입될 때까지 일본의 일부라고조차 생각되지 않았다.

야요이 시대의 사회 변화

  • 철기 수입: 야요이 시대 초기에는 한국에서 대량의 철기를 수입했으며, 일본에서 자체적으로 철 제련과 제조 기술이 발달하기까지는 수 세기가 걸렸습니다.
  • 계층 분화: 야요이 일본에서 특히 집단 묘지를 통해 엿보이는 계층 분화의 조짐이 처음 나타난 것도 수세기 후였다. B.C. 100년경 이후에는 공동묘지와는 별개로, 옥으로 된 소품이나 청동거울같이 중국에서 수입된 장신구가 발굴되어 상류계급의 무덤임이 명백히 드러나는 무덤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 전쟁과 방어: 야요이 시대의 인구 증가가 지속되고, 물이 필요한 벼농사에 적합한 좋은 늪지대나 물을 댈 수 있는 평원이 메워지기 시작하면서 전쟁이 발생했습니다. 고고학적 증거로는 대량 생산된 화살촉, 방어를 위한 해자, 뾰족한 무기에 뚫린 채 발견된 두개골 등이 있습니다. 야요이 일본이 치른 전쟁에 관한 이러한 증거물은 중국의 연대기에서 묘사된 왜와 무수한 작은 정치집단으로 나뉘어 전쟁을 일삼던 고대 일본에 대한 설명을 보완해준다.

고분 시대

우리는 고고학적 발굴과 실망스러울 만큼 모호한 후대의 기록을 통해 A.D. 300년에서 70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정치적으로 통일된 일본이 출현했다는 사실을 희미하게 짐작할 뿐이다.
A.D. 300년 이전에 조성된 상류층의 무덤은 규모가 작고 지역의 특색이 가미되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A.D. 300년 초반을 전후해, 혼슈의 기나이 지역에서 열쇠 구멍처럼 생기고 거대한 흙더미로 이루어진, 고분이라 불리는 무덤이 축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후 이러한 고분들은 이전엔 야요이 문화권이었던 규슈에서 혼슈 북부에 이르는 전 지역에서 점차 나타나게 된다.
어째서 기나이 지역일까? 아마도 이 지역이 일본에서 가장 비옥한 농경 지대 중 하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 지역은 오늘날 엄청나게 비싼 고베 소고기가 생산되는 곳이며 1868년 수도가 도쿄로 옮겨지기 전까지 고대 도읍지였던 교토가 위치한 곳이다.
고분은 길이 450m, 높이 30m에 달하는, 아마도 고대 세계에서 가 장 큰 흙무덤일 것이다. 엄청난 인력이 필요했을 거대한 무덤과, 일본 전역에 걸쳐 고른 형태의 무덤이 분포한다는 사실은 그만한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정치적 통일을 이룬 강력한 통치자가 존재했음을 암시한다.
고분에서는 화려한 부장품이 발견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가장 거대한 규모의 무덤만큼은 발굴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그 무덤들에는 일본 왕실의 조상들이 묻혀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고분은 당시 일본이 중앙집권 정치체제를 구축했다는 명백한 증거이며, 이는 휠씬 후대에 한국과 일본에서 쓰인 연대기에 기록된 고분 시대 일왕에 관한 설명을 강화한다. 고분 시대에 한국이 일본에 끼친 엄정난 영향은 불교, 문자, 승마, 새로운 자기, 야금술 등을 아시아 본토에서 일본으로 전파했다는 점이다(한국의 주장대로 한국이 일본을 지배한 것이든 일본의 주장대로 일본이 한국을 지배한 것이든 간에 말이다).

일본의 첫 번째 연대기

  • 연대기 완성: A.D. 712년, 마침내 일본은 첫 번째 연대기를 완성했습니다. (일부는 신화이고, 일부는 실제 사실을 고쳐 쓴 것이긴 해도) 적어도 712년에 일본에 거주한 사람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일본인이 확실하며, 그들이 쓴 옛 일본어 또한 의심의 여지없이 현대 일본어의 원형이다.
  • 일왕 계보: 현재 일왕 아키히토는 연대기가 쓰인 712년에 황제였던 이의 82번째 직계 후손이며, 그는 전통적으로 태양신 아마테라스의 손자의 손자의 손자의 손자뻘인 전설상의 첫 번째 왕 진무의 125번째 직계 후손으로 간주됩니다.

일본인의 조상에 관한 세 가지 학설

일본 문화는 1만여 년간 지속된 조몬 시대보다 700여 년간의 짧은 야요이 시대에 휠씬 더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된다. 조몬 시대의 정체성(일명 보수성)과 야요이 시대의 급격한 변화가 이루는 대비는 일본 역사상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분명 B.C 400년경에 어떤 중대한 일이 생겼던 것일 텐데, 그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현대 일본인의 조상은 조몬인일까 야요이인일까, 아니면 그 둘의 혼혈인일까? 일본에는 이 세 가지 학설을 둘러싼 열띤 논의가 계속 진행되고 있다.

1. 조몬인 진화설

첫 번째 학설은 조몬의 수렵 채집민이 점차 현대 일본인으로 진화했다는 의견입니다. 이 학설은 조몬 사회가 이미 수천 년간 마을을 이뤄 정착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농업을 받아들였을 것이라 주장합니다. 야요이 시대로의 변화는 조몬 사회가 식량 생산을 늘려 인구 증가를 가능케 한, 추위에 강한 볍씨와 관개 수로에 관한 정보를 얻은 것 그 이상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 학설은 몇몇 현대 일본인들에게 설득력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이는 한국인의 유전자가 일본인의 유전자로 전해졌다는 이야기를 축소시키며, 일본인이 최소 1만 2천 년간 독자성을 지켜온 것으로 그리기 때문입니다.

2. 대규모 한국 이주설

두 번째 학설은 야요이 시대의 변화가 어마어마한 수의 한국인이 한국의 농업 기술과 문화, 유전자를 가지고 이주한 결과라고 주장합니다. 규슈는 한국보다 따뜻하고 습해 벼농사에 적합한 환경이므로, 한국인 식량 생산자들에게는 천국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야요이 일본은 한국에서 수백만의 이주자를 받아들였고, 이들 이민자들은 야요이 전환기 무렵 약 7만 5천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조몬인의 유전자를 압도했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현대 일본인은 지난 2000년간 그들의 고유한 문화를 수정ㆍ발전시켜온 한국인 이민자의 자손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3. 소규모 한국 이주 및 인구 증가설

마지막 학설은 한국에서부터 이주가 있었다는 증거는 인정하지만, 그 규모는 크지 않았다고 봅니다. 대신, 생산성 높은 농경으로 인해 벼농사를 짓는 적은 수의 이주 식량 생산자들이 조몬 수렵 채집민보다 훨씬 빠르게 증가해 결국 그들을 압도했을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예를 들어, 5000명의 한국인이 규슈에 왔다고 가정해보면, 그들은 벼농사를 지으며 아이를 낳아 길러서 1년에 1%씩 인구가 증가했을 것입니다. 이는 수렵 채집민의 증가율보다 훨씬 높은 수치지만, 농경문화권에서는 쉽게 달성할 수 있습니다. 일례로 현재 케냐의 인구는 1년에 4.5%식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700년이 지나면 5000명의 이주자는 500만 명의 자손을 남기게 되고, 조몬인은 자취를 감추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 학설과 마찬가지로, 대규모 이주 없이도 한국인이 현대 일본인의 조상이 되는 것이다.

학설들의 타당성 평가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나타난 비슷한 양상의 변화와 비교해보면, 두 번째나 세 번째 학설이 첫 번째 학설보다 더 타당하게 보입니다. 지난 1만 2천여 년간 농경은 전 세계에서 채 아홉 군데가 되지 않는 곳에서만 발생했습니다. 중국, 비옥한 초승달 지대, 나일 강, 티그리스 강, 페르시아 만을 연결하는 고대 농업 지대, 그리고 다른 몇몇 지역들이 그 예입니다. 1만 2천 년 전, 지구에 살던 모든 사람들은 수렵과 채집을 했습니다. 오늘날 인류의 대다수는 식량 생산자이고, 나머지도 식량 생산자가 있어야 먹고삽니다.

이렇듯 얼마 안 되는 발상지에서부터 농경이 퍼지게 된 이유는 수렵 채집민이 농경을 받아들인 결과가 아닙니다. 조몬인들이 B.C. 10700년에서 400년까지 그랬듯이, 수렵 채집민들은 보수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대신에 농경은 보다 우월한 농사 기술을 발전시킨 식량 생산자들이 수렵인과 이족 결혼을 한 후, 수렵인을 죽이거나 그들을 경작하기 적합한 땅에서 몰아내면서 전파되었습니다.

근대에 들어서 유럽의 식량 생산자들은 북아메리카 서부의 인디언과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남아프리카의 산족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선사시대에는 석기를 사용하는 식량 생산자들이 유럽과 동남아시아, 인도네시아까지 수렵인들을 모조리 대체한 것입니다. 선사시대 내내 식량 생산자들이 수렵인들에게서 취한 이득은 아주 적었지만, B.C. 400년의 한국인 식량 생산자들은 조몬 수렵인들에게서 막대한 이익을 취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국인들은 이미 철기와 집약 농업에 관한 고도로 발전된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인의 기원에 관한 학설 검증

일본에 관한 이 세 학설 중에 어느 것이 맞는 것일까? 이 질문에 바로 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조몬인과 야요이인의 유골과 유전자를 현대 일본인과 아이누인과 비교하는 것이다. 최근 몇 년간, 분자유전학자들은 고대 인류의 유골에서 DNA를 추출하여 고대 일본인과 현대인의 모집단을 비교하는 실험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조몬인과 야요이인의 골격이 평균적으로 쉽게 구분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1. 조몬인과 야요이인의 골격 비교

조몬인들은 키가 작은 편이고, 상대적으로 아래팔이 길며 다리가 짧다. 둥글넓적한 얼굴은 눈 사이가 멀고 눈두덩이 두드러지게 솟아오른 데다, 코와 콧마루가 뚜렷한 얼굴 지형도를 그릴 수 있다. 야요이인은 조몬인보다 평균 3~ 5cm가량 더 크고, 얼굴은 길고 좁았으며, 눈 사이가 멀고 눈두덩과 코는 평평했다. 몇몇 야요이 유골은 여전히 조몬인과 비슷한 모습이었지만, 그것은 조몬과 야요이 변천에 관한 어떤 이론에서도 예상할 수 있는 바다. 그러나 고분 시대에 이르러서는 아이누인을 제외한 모든 일본인의 끌격이 같아지며 현대 일본인 및 한국인과 닮은 형태로 나타난다.

2. 현대 일본인과 아이누인의 유전적 유사성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조몬인의 두개골은 현대 일본인보다는 현대 아이누인과 더 유사합니다. 반면, 야요이인의 두개골은 현대 일본인과 가장 닮았습니다. 현대 일본인이 한국인과 비슷한 야요이인과, 아이누인과 비슷한 조몬인의 혼혈이라는 가정하에서, 유전학자들은 이 두 유전자 그룹의 상대적인 구성 비율을 계산하려 시도한다.
결론은 현대 일본인의 유전자 구성 비율은 한국인/야요이인 쪽이 우세합니다. 특히, 한국인 이주자들이 가장 많이 도착하고 조몬인의 인구가 가장 적었던 일본 서남부에서 아이누인/조몬인의 유전자는 제일 희박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견과류 숲이 울창하고 조몬인의 인구밀도가 가장 높으며. 야요이인의 벼농사가 번성하지 못한 일본 북부 지역에서는 아이누인/조몬인의 유전자 구성 비율이 제일 높게 나타납니다.

3. 유전자 구성 비율과 인구 증가

고대 DNA 연구를 통해 유전자 구성 비율을 계산한 결과, 현대 일본인의 유전자는 한국인/야요이인의 유전자가 더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국에서의 이주는 현대 일본인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것이 엄청난 규모의 이주였는지, 아니면 소수의 이주였지만 높은 인구 증가율에 힘입은 팽창이었는지에 대한 결론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또한 아이누인은 야요이를 지배한 한국인과 현대 일본인의 유전자가 뒤섞인 조몬인의 후손일 확률이크다.

4. 한국의 농업 발전과 일본으로의 전파

조몬 수렵인에게 벼농사 기법을 전해준 한국인 식량 생산자들이 마침내 엄청난 이익을 얻게 되었다는 설명을 했는데, 혹자는 어째서 한국인은 수천 년 전에 농경을 받아들이고도 한동안 일본에 기술을 전해줄 생각을 하지 않다가 느닷없이 진출해 성과를 거두게 되었는지 궁금해 할 것이다.
앞서 나는 한국의 초기 농경은 생산적이지 못했고 오히려 수렵 채집민이 가난한 식량 생산자를 능가하는 결과를 얻었다고 언급했다. 결국 농업 생산량이 수렵과 균형을 맞추게 되고 야요이 혁신을 가져온 원동력은, 아마도 동시에 진행된 네 가지 요소가 조화를 이뤘기 때문일 것이다.

  1. 마른논에서의 비생산적인 벼 농사가 아닌 관개수로를 이용한 벼농사의 발전
  2. 추운 기후에 견디는 벼 품종의 지속적인 개량
  3. 한국의 식량 생산 인구 증가와 이주에 대한 압력
  4. 나무 삽과 괭이, 벼농사에 필요한 다른 기구 등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한 철기의 발달

철과 집약 농업이 동시에 일본에 전파된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일본과 한국의 역사적, 언어적 유사성 분석

1. 아이누인과 일본인의 기원

어떻게 외모가 독특한 아이누인과 그렇지 않은 일본인이 함께 일본에 살게 되었는지에 관해 명쾌한 해석을 내놓았다.

다른 동아시아 민족, 특히 한국인과는 외모와 유전자 면에서 특이성은 찾기 어렵다. 일본인과 큰 차이를 보이는 홋카이도 최북단 섬에 사는 아이누족을 제외하고 일본 전역에 사는 사람들끼리는 별로 차이점이 없다. 이로써 일본인이 동아시아 본토에서 최근에 이주해왔고, 열도의 원주민을 대표하는 아이누족을 대체했다는 사실을 추론해볼 수 있다.

아이누인은 원래 일본에 살던 원주민의 후손일 확률이 크고, 현대 일본인은 근래에 일본으로 이주해온 민족에서 이어져 내려왔을 거라는 의견이다. 이제 그 주장의 근거가 되는 고고학과 형질인류학, 유전학에서 찾을 수 있는 복합적 증거를 살펴볼 차례다.

2. 언어적 유사성의 문제

이것이 사실이라면 일본어가 여느 동아시아 본토의 언어와 매우 밀접한 유사성을 보일 것이라는 사실도 유추할 수 있다.

이는 앵글로색슨족이 ad6세기 경 유럽 본토에서 영국으로 이주함에 따라 영어가 여타 게르만 언어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만일 일본인들이 정말로 근래에 한국에서 유입된 이주자의 후손이라면, 일본어와 한국어가 매우 유사할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만일 일본인이 멀지 않은 과거에 규슈 지방에서, 아이누인과 닮은 조몬 토착민과 한국에서 온 야요이 침략자들의 혼혈에서 유래했다면, 일본어는 한국어와 아이누어 양자와 매우 밀접한 유사점을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일본어와 아이누어 사이에는 뚜렷한 관련이 없고, 일본어와 한국어 역시 큰차이를 보인다. 겨우 2400년 전에 민족의 융합이 일어났는데, 어떻게 해서 이렇게 차이가 날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모순에 대한 나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규슈에 살던 조몬인의 언어와 이주해온 야요이인의 언어는 사실 현대 아이누어나 한국어와 그다지 유사하지 않았던 것이다.

3. 홋카이도 조몬어와 아이누어

우선 아이누어를 살펴보자. 알다시피 아이누어는 근래에 일본의 일부인 홋카이도에서 살던 아이누인들이 사용했던 언어다. 홋카이도의 조몬인 역시 아이누어와 비슷한 말을 썼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규슈의 조몬인은 분명 다른 언어를 썼을 것이다. 규슈의 남쪽 끝에서 홋카이도의 북쪽 끝까지 일본 열도의 충 길이는 2400km에 달한다.
이로 인해 조몬 시대에는 도구 제작 기술과 토기 형태가 지역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났고, 이러한 지역적 차이는 역사적으로도 계속된 정치적 분쟁을 불러왔다. 1만 년 동안 조몬 시대가 지속되면서 그에 상응하는 언어적 다양성 역시 크게 발달했을 것이다.

만일 고고학적 증거가 암시하는 것과 같이, 남쪽의 조몬인들과 북쪽의 조몬인들이 각각 러시아와 한국에서 건너왔다면, 어쩌면 그들의 언어는 1만 2천 년전 혹은 더 오래전에 이미 다른 언어가 됐을 수도 있다.
사실 홋카이도나 혼슈 북부의 많은 지명에는 아이누어에서 강을 뜻하는 ‘나이’ 나 ‘베쓰’ , 그리고 ‘곶’ 을 뜻하는 ‘시리’ 가 포함된 단어가 상당수 있다. 하지만 이렇듯 아이누의 영향력이 짙게 밴 이름은 일본 남부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야요이인과 일본인 정복자들이 조몬의 여러 지명을 차용했음을 뜻한다. 미국에 이주한 백인들이 ‘매사추세츠’나 ‘미시시피’ 와 같은 원주민 지명을 차용한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아이누어가 일본 북단에서만 사용되던 언어였다는 점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

4. 규슈 조몬어와 오스트로네시아 어족

한편 규슈에서 사용되던 조몬어는 폴리네시아와 인도네시아어 및 타이완의 토착어가 속하는 오스트로네시아 어족과 같은 뿌리에서 파생되었을 것이다. 많은 언어학자들은 일본어가 오스트로네시아 어족에서 어느정도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해왔다. 가령 두 언어 모두 이른바 ‘개開음절(모음으로 끝나는 음절로, ‘히-로-히-토’를 예로 들 수 있다)’ 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 고대의 타이완인은 뛰어난 해상민족이었는데, 그들의 후손들은 사방으로 진출해 흩어졌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북상하여 규슈에 도달했을 수 있다.
즉 근대 홋카이도의 아이누어는 고대 규슈의 조몬어의 모델로 적합하지 않다.

5. 한국어와 고대 야요이어

마찬가지로 B.C. 400년경 한반도에서 이주해온 이들의 언어를 고대 야요이어의 원형이라고 간주하기도 어렵다. 한국은 정치적인 통일을 이룩한 A.D. 676년 이전에 세 개의 왕국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현대 한국어는 그중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언어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신라는 일본과 그다지 긴밀한 관계를 맺지 않았다. 한국의 초기 연대기를 보면 삼국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했다.
신라에 복속된 고구려와 백제의 언어는 후세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부 전해지는 고구려어 단어들을 보면, 현대 한국어보다 오히려 옛 일본어의 그것과 더욱 유사하다. 삼국이 통일되기 전인 B.C. 400년경 한반도의 언어는 보다 다양한 형태를 띠었을 것이다. 당시 일본에 전해져 현대 일본어의 기원이 되었던 한반도의 언어는 현대 한국어의 기원이 된 신라의 언어와는 크게 달랐으리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한국인과 일본인은 언어보다 외모나 유전자에서 더 많은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일본어도 어쩌면 2000년 전 한반도의 유민들이 일본에 전해준 말일지도 모른다. 일본어는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후 현재 한반도에서 쓰고있는 한국어와 같은 신라말이 대체해버린 여러 고대언어중 하나가 변형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론

이러한 결론은 일본과 한국, 양국이 최근 서로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탓에 어디에서도 인기를 끌 만한 주장은 아닌 것 같다. 양국의 지난 역사는 서로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게 했다. 아랍인과 유대인의 경우처럼 한국인과 일본인은 같은 피를 나누었으면서도 오랜 시간 서로에 대한 적의를 키워왔다. 하지만 동아시아와 중동에서의 이러한 반목은 함께 해결해나갈 수 있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수긍하기 힘들겠지만, 그들은 성장기를 함께 보낸 쌍둥이 형제와도 같다. 동아시아의 정치적 미래는 양국이 고대에 쌓았던 유대를 성공적으로 재발견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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