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체아 엘리아데의 샤머니즘 – 발췌 및 정리

미르체아 엘리아데의 책 “샤머니즘”은 민족학자, 사회학자, 심리학자들이 나름의 시점에서 수집한 방대한 무속 자료를 엘리아데가 비교종교학의 입장에서 정리한 것입니다.

머리말, 개요 정리

이 책은 처음으로 샤마니즘의 모든 현상을 밝히는 동시에 샤마니즘을 종교사 전체 속에 자리 매김하고자 하는 책이다. 이 말은 이 책이 불완전한 책, 근사치적인 책, 위험을 안은 책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연구자들에게는 샤마니즘에 대한 상당량의 자료가 베풀어져 있다. 게다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상당히 중요한 연구업적이 샤마니즘의 민족학적, 사회학적, 심리학적 연구의 실마리가 되어왔다. 그러나 이 지극히 복잡한 종교 현상을 종교사학 전반의 준거틀로 해석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몇몇 주목할 만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샤마니즘에 관한 많은 연구에서 이것이 무시되어왔다.
우리는 여기에서 종교사학자로서 샤마니즘을 연구하고 이해하고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에게 심리학, 사회학, 민족학의 관점에서 이루어진 눈부신 연구업적을 깎아 내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이루어진 연구업적이 샤마니즘의 다양한 측면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요긴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접근방법도 있을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이 책에서 밝히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이다.

심리학적 접근

심리학자들은 샤머니즘을 주로 위기 상황 혹은 퇴행적인 심리 상태의 드러남으로 보며, 이를 정신병이나 이상 상태(異常狀態)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아데는 샤머니즘을 단순히 히스테리 혹은 간질병 같은 정신병과 같은 유형으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봅니다. 그러나 심리학자들의 지적중에는 주목을 끄는 대목이 하나 있다. 그것은 샤먼으로서의 소명 역시 다른 종교에서의 소명과 마찬가지로 위기 상황에서 나타나며, 즉 장차 샤만이 될 사람의 정신적 평형이 일시적으로 무너지는 상태의 순간에 나타난다는 지적이다

사회학적 접근

사회학자들은 샤먼, 사제(priest), 주술사(magician)의 사회적 역할과 기능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합니다. 이들은 주술적 능력에서 오는 특권, 사회 구조 내에서의 역할, 종교 지도자와 정치 지도자와의 관계 등을 탐구합니다. 샤마니즘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연구는 종교사회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종교사학자들은 이 방면의 연구성과와 결론을 중요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심리학자들에 의해 밝혀진 심리학적 상황은 물론이고 이렇게 연구된 사회학적 상황은, 이 말이 내포하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 종교사학자들이 다루는 자료의 인간적, 역사적 구체성을 강화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민족학적 접근

민족학자들은 샤먼의 문화적 환경과 샤머니즘의 다양한 요소를 철저히 연구합니다. 샤만의 의상, 무고(巫鼓), 세앙스(seance: 굿) 등의 요소를 분석하고 기록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민족학자는 샤마니즘의 확산의 중심이나 그 전파의 단계론 및 연대론을 분명하게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어쨌든 우리에게는 순수하게 기록적인, 놀랄 만큼 많은 민족학적 문헌이 있는데다가 지금도 연구자료로 동원할 수 있는 수 많은 역사학적 민족학의 자료가 있다. 이로써 우리는 이른바 “비역사적인(ahistorical)” 사람들에게서 거두어들인 “짙은 안개”에 싸여 있던 문화적인 자료에서 선이 뚜렷한 하나의 윤곽을 보게 되기에 이르렀다. 말하자면 우리가 지금까지 “자연민족(Naturvölker),” “원시인들 (primitives),” “미개인들 (savages) “이라고 부르던 사람들에게서 “역사”를 발견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연구는 종교사학자들에게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며, 종교사학자들은 이를 통해 보다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자료를 확보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학적 민족학이 종교사학을 대신 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문화민족학은 가령 샤마니즘과 특정 문화권과의 관계나 이러저러한 샤마니즘 복합체의 전파과정 같은 것에 관한 문제를 해명할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화민족학의 목적이 이러한 종교 현상의 보다 깊은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그 상징체계를 해명하는 것이어서도 안 되고 종교 현상을 종교사 전체 속에다 자리잡아 주는 것이어서도 안 된다. 요컨대 샤마니즘에 관한 개개의 연구성과를 통합하고 복합적인 종교 현상의 형태론인 동시에 역사일 수 있는 포괄적인 견해를 제시하는 것은 종교사학자들의 몫인 것이다.

종교사학적 접근

종교사학자들은 다양한 학문적 접근을 통해 샤머니즘의 복합적이고 심오한 의미를 파악하려고 합니다. 이들은 심리학, 사회학, 민족학의 연구 결과를 통합하여 종교 현상의 형태론(morphology)적, 역사적 분석을 시도합니다. 종교사학자들은 샤머니즘을 단순히 역사적 사실로만 보지 않고, 그 현상이 인류의 한계 상황을 드러내는 중요한 종교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종교사학자는 종교 현상의 역사적, 초역사적 의미를 해독하고, 이를 통해 인류의 진정한 자리를 파악하려고 노력합니다.

성의 현현과 종교의 역사

이 책에서 연구자는 역사와 종교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역사적 상황이 종교 현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예를 들어, 알타이 샤만은 의례적으로 자작나무에 오른다. 이 나무에는 발판 노릇을 할 홈이 여러 개 패어 있다. 여기에서 이 자작나무 자체는 세계수(世界樹, World Tree)를 상징하고 발판 노릇을 하는 홈은 이 샤만이 접신 (接神: ecstacy)상태에서 통과해야 할 여러 단계의 하늘을 상징한다. 샤만은 이 여러 단계의 하늘을 지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궁극적인 하늘에 이르러야 한다. 이 의례가 드러내고 있는 우주론적 도식을 보고 이것이 오리엔트의 의례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주장은 참으로 그럴 듯하다. 고대 근동의 종교적 관념이 멀리 중앙 아시아와 북아시아까지 침투했고 이것이 중앙 아시아와 시베리아의 샤마니즘에 오늘날의 형태를 부여한 것은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종교적 이데올로기와 종교적 기술(技術) 전파에 관하여 “역사”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썼다시피 종교 현상의 역사 는 그러한 현상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는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모든 것을 다 보여줄 수 없다. 오리엔트의 우주론과 종교가, 알타이 인들이 이데올로기나 천계상승(天界上昇) 의례를 창조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비슷한 의례와 이데올로기는 전 세계적으로, 고대 오리엔트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지역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오리엔트의 종교 관념은 천계 상승의 의례 형식과 그 우주론적 의미를 수정 한 것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천계상승의 우주론적 의미는 원초적인 현상인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자면 이러한 것은 인간 그 자체로서의 속성이지 역사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의 속성은 아니라는 것이다.

연구자는 종교 현상이 역사적 상황과 독립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인간은 꿈, 환각, 상승의 이미지를 역사적 상황과 관계없이 전 세계에서 경험하며, 이는 인간의 속성 중 하나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종교 현상의 심오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종교사학자의 임무라고 말합니다.

종교사학자는 역사적-종교적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자료를 조직화하며, 종교 현상이 인류의 한계 상황을 드러내는 현상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종교사학자는 종교 현상을 심리 현상이나 사회 현상으로만 보는 대신, 종교 현상으로 보고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는 종교사학자가 현상학자와 다른 점입니다. 현상학자는 종교 현상을 비교하지 않고 그 의미를 탐구하는 반면, 종교사학자는 다양한 종교 현상을 비교하여 그 의미를 이해합니다.

종교사와 종교의 역전성

종교사는 단순히 종교의 역사를 기술(historiography)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어진 종교 현상(셈 족의 공희제(供犧祭)나 헤라클레스 신화 등)을 기술하면서 연대기적인 눈으로 당시에 “있었던” 모든 것을 다 보여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종교적 사실은 역사적 상황에서 나타나지만, 그 초역사적 내용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종교적 사실은 역사적 상황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현상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히에로파니의 경향을 고려해야 합니다.

  1. 종교의 역사와 역전성:
    • 종교의 역사는 단선적이지 않고, 어떤 종교적 상태나 믿음도 역전될 수 있습니다. 일신교에서 다신교로, 또는 반대로도 변화할 수 있습니다.
    • 종교는 역사 속에서 다양한 변화를 겪으며, 그러므로 어떤 양식도 퇴폐나 분해를 피할 수 없고 어떤 “역사”도 최종적일 수 없다.
    • 이 말은 성의 현현이 종교의 연대기적 전망이라는 개념과 무관하다는 뜻은 아니다. 종교의 역사는 존재하지만, 이 종교의 역사라는 것 역시 다른 모든 종류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역전될 수 없다는 속성을 지닌다. 일신교가 일신교적 “역사”를 이루어왔고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 역사 안에서 일신교를 접하게 되어 이를 믿게 된 뒤에는 다신교나 이교 (異敎)로 되돌아갈 수 없다고 해서, 일신교적인 종교 의식이 그 존재양식 전체를 통하여 항상 일신교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반면에 자신이 일신교 신자라고 생각하고 일신교를 신봉하면서도 다신교 신자가 되거나 토테미즘의 신자로서 그 종교 행사에 열중하는 것도 가능하다. 성의 변증법은 모든 가역성을 용인한다.
  2. 종교적 체험의 보편성:
    • 특정 문화나 시대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인간은 다양한 종교적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 예를 들어, 원시인이 일신교 예언자의 경험을 추체험(追體驗)할 수 있는 것처럼,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에서도 동일한 종교적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 원시인들이 일신교 예언자들의 경험을 추체험하고자 할 때 필요한 것은, 지금의 종교 의례에서는 거의 사라졌지만 세계 도처에서 볼 수 있었던 천신(天神)의 히에로파니를 “현실화”하는 일이다. 이 세상에 완전히 순수하지 않은 종교 양식, 일관된 신비주의를 연출할 수 없는 종교 양식은 거의 없다.
  3. 성의 현현(顯現)과 자발성:
    • 성현((聖賢, 히에로파니)은 어떤 역사적 상황에서도 발생할 수 있으며, 이는 종교의 자발성을 보여줍니다.
    • 종교적 의식에서 새로운 성현이 발생할 때, 이는 과거의 성현을 반복하지만, 그 자발성을 마비시키지 않습니다.

샤마니즘과 종교 연구

  • 샤마니즘은 고대의 접신술로서 주술과 종교의 한 형태입니다.
  • 중앙 아시아와 북아시아에서의 샤마니즘을 다루며, 그 이데올로기, 기술, 상징체계, 신화를 분석합니다.
  • 종교사학자로서 샤마니즘 현상을 소개하고 분석하는 것이 목적이며, 일반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를 추구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샤마니즘은 고대의 접신술ㅡ신비주의인 동시에 주술이자 넓은 의미에서는 “종교”ㅡ의 하나이다. 우리는 이것을 다양한 역사적, 문화적 국면에서 소개하고 중앙 아시아와 북아시아에서의 샤마니즘의 발전 소사(小史)를 살펴보려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샤마니즘적 현상 그 자체를 소개하고 그 이데올로기를 분석하고 그 기술과 상징체계와 신화를 검토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이러한 작업이 전문가들에게뿐만 아니라 일반 교양인들에게도 흥미롭게 받아들여지리라고 믿는다.
이 책은 원래 일반 교양인들을 대상으로 쓰인 것이다. 가령 중앙 아시아의 무고가 극북지방에 전파된 점을 논구(論究)하기 위해 수집한 자료는 소수의 전문가들에게는 흥미가 있을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는 아주 따분한 자료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샤마니즘 일반 혹은 여기에 나타나는 접신술 같은, 광대하고 다양한 정신의 우주에 들어서게 되면 사정은 아주 달라진다. 이 경우 우리는 바로 정신세계 전체를 다루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감히 바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세계는 우리들 자신의 세계는 아니지만, 일관성이 없는 세계 혹은 흥미가 없는 세계는 결코 아닌 것이다.
우리는 감히 이러한 세계에 관한 지식이 진정한 휴머니스트들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믿는데, 그 까닭은 휴머니즘이 위대하고 풍요로운 서구의 정신적 전통과 동일시되지 않은 지가 꽤 오래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연구의 한계와 목적

  • 이 책은 샤마니즘에 관한 완벽한 연구가 아니며, 자료의 부족과 연구자의 한계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 주요 목적은 비교종교학자와 종교사학자의 입장에서 샤마니즘을 이해하고, 일반 독자들에게 이를 알리는 것입니다.

1장 개설: 성무방법, 샤머니즘과 무업

샤머니즘은 시베리아와 중앙 아시아에서 특히 두드러진 종교 현상입니다. 샤먼이라는 말은 퉁구스 어 샤먼(saman)에서부터 러시아 어를 통하여에서 유래했으며, 각 지역에서 다양한 명칭으로 불립니다.
중앙 및 북아시아 어에서 이에 상당하는 것은 야쿠트 어의 오주나(ojuna: oyuna), 몽고어의 뷔게 (bugä), 뵈게(bogä: buge, bu)와 우다간 (udagan: 부르야트 어의 우다얀(undayan), 야쿠트 어의 우도얀(udoyan) 등 여무(女巫)를 나타내는 말 참조), 터키-타타르 어의 캄(kam:알타이 어의 캄(kam), 감(gam), 몽고어의 카미(kami) 등 참조)이다. 퉁구스 어의 술어를 팔리 어인 사마나(samana : 사문(沙門))로 설명하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샤머니즘은 접신술로 정의될 수 있으며, 탈혼망아(脫魂忘我) 체험을 통해 종교적 경험을 얻는 방식입니다.
중앙 및 북아시아 전반에서 샤먼이 사회의 주술적-종교적 생활의 중심을 이루고 있지만, 이는 샤먼이 유일한 성사(聖事) 담당자였다는 뜻도 아니며, 샤만이 그 사회의 종교 생활을 한손에 장악하고 있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부족의 족장이 곧 부족 의례의 사제였고, 공희사제(供犧司祭, sacrificing priest)가 함께 존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샤먼은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탈혼망아 체험이야말로 고귀한 종교적 체험으로 인정되는 지역 안에서는 오로지 샤먼만이 접신의 전문가일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샤머니즘과 유사한 주술적-종교적 현상은 중앙 아시아나 북아시아 외에도 북아메리카, 인도네시아, 오세아니아 등에서도 관찰됩니다. 북아메리카 등지의 종교 현상 역시 모두 무속적이다. 따라서 이들 지역의 종교 현상을 시베리아 샤마니즘과 함께 연구해야 할 이유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지역의 무속적 복합(複合)이 나타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해당 민족의 주술적-종교적 생활이 반드시 샤머니즘 중심으로 결정(結晶)되어 있는것은 아닙니다. 샤마니즘은 주술과 종교의 다른 형태와 공존하는것이 일반적입니다.

샤마니즘을 주술사, 주의와 구별되는 엄밀한 고유의 의미로 사용하면, 각 지역에서의 무속적 복합 문화의 정체 검증은 바로 결정적 의미를 획득 할 수 있습니다.
샤마니즘의 주요 특징은 탈혼망아 체험을 통해 접신을 이루는 것입니다. 샤먼은 특별한 주술적 전문성을 갖추고 있으며, 이 때문에 샤만은 주술사와 구별됩니다.
주술과 주술사는 많든 적든 세계 어느 곳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샤마니즘에서 샤만은 특수한 주술적 전문성을 보여 주고 있다. 가령 “불을 다스린다”든지 “주술적으로 하늘을 난다”든지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전문성이다. 바로 이런 능력 때문에 샤만은 주술사의 대접을 받는 것이지만 주술사를 샤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샤만이 병을 고친다는 사실을 두고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주의는 모두 치료자이다. 그러나 샤만은 샤만 나름의 방법, 샤만만이 아는 방법을 쓴다. 샤만의 접신술만 해도 그렇다. 샤만에게는 종교사학이나 종교민족학 자료에 기록된 갖가지 접신 경험이 그의 접신 경험의 전부는 아니다. 바로 이 때문에 접신 경험자라고 해서 다 샤만은 아닌 것이다. 샤만은 탈혼망아의 전문가이다. 사람들은, 이 경지에 든 샤만의 영혼은 육체를 떠나 하늘로 오르거나 지하세계로 내려가는 것으로 믿는다.

샤마니즘의 확산과 문화적 비교

샤머니즘은 중앙 및 북아시아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며, 유사한 현상들이 다른 지역에서도 발견된다. 그런데 특정 종류의 무속적 요소가 고대 주술이나 종교 형태 안에서 고립되어 나타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고대의 주술과 종교의 어떤 범위 안에 샤머니즘이 “원시” 신앙과 기술의 기층(基層)을 보존하고 있는지, 또 어떤 범위까지 그것이 개혁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원시종교에서 샤머니즘의 지위를 밝히려 노력하는 동시에 유사한 현상, 무속적인 의미를 함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현상들에 대해서도 언급해야 한다. 특히, 특정 무속적 요소와 유사한 주술적-종교적 요소를 다른 문화적 총체 안에서 다른 정신적 적응과정을 밟으면서 생겨난 것과 비교하고 지적하는 것이 유익하다.

샤마니즘과 북극권, 터키-타타르인들의 종교

샤마니즘이 중앙 및 북아시아의 종교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샤마니즘이 이 광대한 지역의 종교는 아니다. 몇몇 연구자들이 북극권이나 터키-타타르 인(Turko-Tatars)들의 종교를 샤마니즘이라고 한 것은 편의상 또는 오해한 것이다. 중앙 및 북아시아의 모든 종교는 모든 방향에서 샤마니즘을 넘어 확대, 발전했다. 이것은 모든 종교가 특별한 자격을 갖춘 신자들의 신비적인 체험을 넘어 확대, 발전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샤만은 “택함을 받은 사람”으로서 그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이 가까이 갈 수 없는 성스러운 영역에 가까이 갈 수 있다. 샤만들의 이러한 접신 체험은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성층(成層), 신화나 의례 구조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북극권이나 시베리아 그리고 아시아 여러 민족의 이데올로기나 신화, 의례는 이들 민족 샤만들의 창작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샤마니즘 이전 시대의 산물이거나 적어도 바로 그 시대의 산물이며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것들은 일반적인 종교 체험의 산물이지 특별한 자질을 지닌 인물이나 접신술을 행할 수 있는 특권 계급의 산물은 아닌 것이다.

샤마니즘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

샤만들은 그들이 속한 사회에서 두드러진 존재였다. 말하자면 근대 유럽 사회의 성직자처럼 샤만은 종교적 분위기의 표징을 나타내는 특수한 힘을 지니고 있어서, 그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과 구별된다.
샤만들은 종교 체험을 남달리 강렬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그 사회 의 나머지 구성원들과 구별된다. 그래서 샤마니즘은 종교의 범주보다는 신비주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상당수의 종교에서 샤머니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 까닭은 샤마니즘이 항상 특정 엘리트의 수준에서 행사하는 접신술로 남아 있는데다 특정 종교의 신비주의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교회의 수도사나 신비주의자, 성자들의 역할과 비교할 수 있지만, 이러한 비교를 무리한 선까지 밀고 나가서는 안 된다. 기독교(적어도 근대사에서의)에서 일어나는 사태와는 달리, 샤만 교도들은 샤만의 접신 체험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샤만은 탈혼망아 체험을 통해 교도들을 치료하고 사자를 “명계”로 인도하며, 천상계 및 지하계의 신들 사이에서 중보자(mediator)로 봉사한다. 샤만은 그 공동체의 종교 생활의 방향을 잡는것 뿐만 아니라 “영혼”을 수호한다. 샤만은 인간의 영혼에 관한 한 위대한 전문가이다. 샤먼만이 영혼이라는 것을 “볼”수 있다. 샤만만이 영혼의 “모양”과 운명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병(=영혼의 상실), 죽음, 불행의 문제 등 영혼이 처한 목전의 운명이 해결되어버린 경우나, 접신 체험 (천상계나 지하계로의 여행)을 포함한 대공희 의례의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에도 샤만이 필요 불가결한 존재는 아니다. 종교 생활의 대부분은 샤만 없이도 진행되는 것이다.

북극권, 시베리아 및 중앙 아시아 민족의 종교적 특성

경제 및 생활 방식

북극권, 시베리아, 그리고 중앙 아시아 민족들은 주로 수렵-어업, 목축업-유목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어느 정도 유목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이들 민족들은 종족적, 언어적으로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이들의 종교에는 한 가지 일치하는 대목이 있다.

천상계의 대신과 전능한 창조신

추크치족, 퉁구스족(Tungus), 사모예드족(Samoyed), 터키-타타르족 등 중요한 종족들은 대개 천상계의 대신(大神), 전능한 창조신을 알고 이들을 섬긴다. 이 대신의 이름은 때로는 “천공”이나 “천상계”를 의미하는데, 예를 들어 사모예드 족의 눔(Num), 퉁구스 족의 부가(Buga), 몽고족(Mongols)의 텡그리(Tengri: 부르야트 족(Buryat)의 텡게리(Tengeri), 볼가 타타르 족 (Volga Tatars)의 탱게레(Tangere), 벨티르 족(Beltir)의 팅기르(Tingir), 야쿠트 족(Yakut)의 탕가라(Tangara) 등) 등이 있다. 이러한 신들은 사라져가는 신들(deus otiosus)의 길을 걷고 있지만,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천신의 이름과 특성

이런 신들은 이름에는 구체적으로 “천공”이 아니더라도 하늘의 특징적인 성격을 표상하는 말, 가령 “높은,” “우뚝 솟은,” “찬란한” 같은 말들이 딸려 있다. 예를 들어, 이르티쉬의 오스티야크족(Ostyak)이 섬기는 천신의 이름은 “생케(sanke)”라는 말에서 유래하는데 “찬란하다, 빛난다, 밝다”는 뜻이다. 바로 이 신을 두고 야쿠트 족은 “세계의 추장이신 아버지 주님”이라고 부르고 알타이 타타르 인들은 “흰빛”(Ak Ayas), 코리야크 인(Koryak)들은 “높은 곳에 계시는 분,” “높은 곳에 계시는 주님”이라고 부른다. 터키-타타르 인은 북방과 동북방의 인접 민족들 이상으로 천상의 대신을 지극히 섬기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이 천상의 대신을 “추장,” “주인,” “주님” 그리고 “아버지”라고 부른다.

높은 하늘에 거주하는 이 천신에게는 몇몇 “아들”과 “사자 (使者)”가 있다. 이들은 천신에게 속한 동시에 천신의 처소보다는 낮은 천공에 자리한다. 이들의 이름이나 숫자는 민족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일반적으로는 일곱 혹은 아홉 “아들 신”이나 “딸 신”이 등장하는데, 샤먼은 바로 이들과 예사롭지 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이 천신의 아들 신들, 사자들 혹은 종들은 인간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인간을 도와주는 일을 한다.

신화적 구조와 신들의 역할

이들의 숫자는 민족에 따라 엄청나게 많아지기도 한다. 이러한 경향은 부르야트, 야쿠트 그리고 몽고족의 경우에 특히 두드러진다.
부르야트족의 경우 55위의 선신(善神)과 44위의 악신(惡神)이 존재하며, 이들은 영원히 대립한다. 그러나 뒤에 다시 다루겠지만 신들의 수가 이렇게 불어나고 또 이들이 끊임없이 적의를 품고 대립하고 있는 것은 비교적 최근에 와서 이들이 종교를 혁신한 증거라고 믿을 만한 근거가 있다.

터키-타타르 족의 종교에서는 여신의 비중이 미미하고, 지신(地神) 역시 중요하지 않다. 야쿠트족은 대지의 여신상도 없으며, 제물도 드리지 않는다. 터키-타타르 그리고 시베리아 민족에 몇몇 여신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들 여신들은 여성만을 위한 신들이고 이들이 맡아서 참섭 (參涉)하는 분야도 출산이나 아기들의 질병을 돌보는 일 정도이다. 여성의 역할이 샤마니즘 전통에 다소 보존되어 있기는 하나, 신화에서 여성의 역할은 극히 미미하다.

알타이족에게 천공의 신 혹은 대기(大氣)의 신 다음가는 유일한 대신은 지하계의 주(主)인 에를릭 칸(Erlik Khan)이다. 이 신은 샤먼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극히 중요한 불의 의례, 수렵 의례, 죽음이라는 관념은 이 중앙 그리고 북아시아 종교 생활의 간단한 윤곽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인도-유럽과 터키-타타르 종교의 유사성

형태론적으로 말한다면 이 종교는 일반적으로 인도-유럽 인들의 종교에 가깝다. 이 양자가 다 천공신 혹은 대기의 신을 중요한 신으로 섬기며, 여신을 용납하지 않고 (인도-지중해 지역 종교의 두드러진 특징) “아들 신들” 혹은 “사자들”(아쉬빈(Asvins), 제우스의 아들들인 디오스쿠리(Dioscuri) 등)에게 같은 기능을 부여하고 똑같이 불을 숭배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경제적, 사회적 유사성

사회학적, 경제학적 입장에서 보면 선사시대의 인도-유럽과 터키-타타르가 유사하다는 사실은 한층 더 두드러진다.
이 두 사회는 똑같이 가장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가부장 사회였으며, 수렵과 목축-유목으로 경제를 도모하는 사회였다. 두 문화에서 말(馬)이 지니는 종교적 중요성은 오랜 옛날부터 주목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리고 그리스의 올림포스 공희는 터키-타타르인, 우그르인(Ugrians), 극북 민족이 지내는 희생제가 지니는 특징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것으로 입중되었다. 이들의 희생제는 원시 수렵민과 목축민의 전형적인 공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여기에서 다루고자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고대의 인도-유럽어계와 고대 터키-타타르 인 (원(原) 터키 인(Proto-Turks)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간의 경제적, 사회적, 종교적 유사성을 볼 때, 역사적으로 다양한 인도-유럽 민족이 아직까지 어느 정도는 터키-타타르 인의 샤마니즘에 비견하는 무속적 요소를 보존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순수한” 종교 현상의 부재

역사적 맥락에서의 종교

역사적으로나 세계 어느 곳에서든 완전히 “순수한” 또는 “원초적인” 종교 현상은 발견될 수 없다.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문제에 대한 고민족학적, 선사적 기록은 구석기 시대 이전으로는 소급되지 않는다. 그리고 최초의 석기시대에 앞선 수십만 년 동안 인간이 그 이후와 똑같은 정도로 강렬하고 다양한 종교 생활을 영위하지 않았다고 가정할 만한 근거도 없다. 적어도 석기문화 이전의 인류의 주술적-종교적 신앙 일부가 이후의 종교적 관념이나 신화 속에 보존되어 있었다는 것은 거의 분명하다.

문화 접촉과 종교의 변화

그러나 이 석기문화의 이전 시대부터 내려온 정신적 유산은 선사 및 원사(原史)시대 인류간의 무수한 문화 접촉의 결과로 끊임없이 변화를 겪었다는 것 역시 있을 법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원초적” 현상을 발견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종교 관념, 신화적 창조, 의례, 접신술 등이 변화, 개조, 보완되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는 그 기나긴 내적 변화의 과정을 겪은 뒤에 결국 자율적 구조를 전개하고, 이후 인류가 수용할 “형태”를 제시한다. 그러나 완전히 “새로운” 종교는 없으며, 과거를 완전히 폐기하는 종교적 메시지도 없다. 대신 태고부터 존재해온 종교 전통의 모든 요소를 개조, 갱신, 가치회복 그리고 통합하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샤마니즘의 역사적 지평

이러한 몇 가지 지적은 당분간 샤마니즘의 역사적 지평을 한정시키는 데 요긴할 것으로 보인다. 샤마니즘의 몇 가지 요소는 분명히 고대적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순수”하고 “원초적인”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터키-몽고의 샤마니즘은 고대적 요소로 보이는 형태를 지니고 있지만, 결정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오리엔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근대의 영향을 받지 않은 다른 샤마니즘도 역시 “원초적”인 것은 아니다.

종교적 정위와 샤마니즘

샤마니즘이 가장 발달된 통합 단계에 이른 극북, 시베리아, 중앙 아시아의 모든 종교에 대해, 우리는 한편으로는 수렵 의례와 조상 제사의 종교적 정위(定位)가 전혀 다르다는 데 이런 종교들의 특징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샤만은 이러한 종교적 영역에 다소간은 직접 관여하고 있다. 그러나 샤만의 본령은 종교적 영역이되 특정한 영역에 훨씬 더 깊이 관여한다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접신 체험과 주술로 구성되는 샤마니즘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이러한 종교적 영역에 선행하거나 시대를 같이하는 다른 종교 구조에 순조롭게 적응한다. 관련된 민족의 일반적인 종교 생활의 틀 안에서 어떤 무속적 행위의 기술(記述)을 되짚어 생각할 때마다(예를 들어 우리는 지금 천상계의 대신과 이 대신에 관한 신화를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적잖이 놀라곤 한다. 이때 우리는 두 개의 전혀 다른 종교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인상으로, 서로 구조적 차이가 있는 두개의 종교적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샤만의 행위에서 야기되는 종교적 체험의 강도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샤만의 굿거리에는 대개의 경우 접신의 수단이 사용된다. 그리고 종교사는 여기에서 우리에게 이 이상으로 오류와 왜곡에 승복하는 종교적 체험이 없음을 보여준다.

샤마니즘 연구의 주의점

샤마니즘을 연구할 때, 몇몇 특수하고 “사적인” 종교적 요소를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요소에 대한 연구는 그 공동체의 나머지 구성원의 종교 생활에 대한 연구와는 구별해야 한다. 샤만은 “이탈함(separation)”으로써, 비극적인 위대함과 아름다움에 모자라지 않게 깃들어 있는 정신의 위기(spiritual crisis)로써 자신의 새롭고 참된 삶을 시작한다.


제2장 신병과 접신몽

에스키모 샤먼의 입문의례

에스키모 샤먼의 입문의례 중에서 스승은 제자를 위하여 ‘앙개코크(angakoq)’를 취한다. 이것은 ‘카우마네크(qaumaneq)’라고도 불리며, 제자에 대한 “점화(點火)” 혹은 “깨달음의 베풀기”를 의미한다. 앙개코크는 샤먼이 문득 몸 속, 머리 속, 뇌 속에서 느끼는 신비스러운 빛으로 이루어진, 설명할 수 없는 탐조등, 휘황찬란한 불이다. 이 불은 샤먼으로 하여금 어둠을 꿰뚫어보게 한다. 이로써 샤먼은 눈을 감고도 사물을 인지하며,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미래의 사건을 예견할 수 있게 된다. 이를 통해 샤먼은 미래와 타인의 비밀을 투시할 수 있게 된다.

고급 신비주의와의 연관성

여기에서 우리는 시베리아 샤마니즘의 특징을 이루는 천계상승 체험, 혹은 비상의 체험을 엿볼 수 있다. 시베리아 샤마니즘의 특징을 이룬다고는 하나 이러한 체험은 세계 도처에서 발견되는 일반적인 무속적 기술의 전형적인 유형이기도 하다. 여기에서는 이글룰리크 샤먼의 무업을 가능하게 하는 내부의 빛 체험이 다양한 고급 신비주의와 가깝게 닿아있다는 점만 지적하고자 한다.

우선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우파니샤드(Upanisads)는 “내부의 빛 (antar jyotih)”을 아트만(atman: 자아)의 정수(精髓)로 정의한다. 요가에서, 특히 불교의 여러 유파에서는 색깔이 다른 여러 가지 빛이 특정 명상에서 성공을 의미한다. 이와 유사하게 티벳의 사자의 서에서는 죽어가는 사람의 영이 죽음의 고통을 당할 때나 죽음 직후 경험하는 빛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인간의 사후 운명(해탈 혹은 윤회재생)은 청정한 빛을 선택하는 부동심에 달려 있다. 우리는 기독교의 신비주의와 신학에서도 내부의 빛이 떠맡는 엄청난 역할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에스키모 샤먼의 체험을 사려 깊게 이해하는 방향으로 우리를 이끈다. 이러한 신비주의적 경험이 어떤 모습으로든 아득한 옛날부터 고대의 인간에게 닿아 있었다고 믿을 만한 근거는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카우마네크와 자기 형해의 관조

에스키모 샤먼의 카우마네크(qaumaneq)는 스승이 제자를 위해 달 영신으로부터 얻어내는 신비적인 능력을 의미한다. 이러한 능력은 제자가 사자의 영신들, 카리보우(순록)의 모신, 혹은 곰의 영신들의 도움을 받아 직접 얻어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는 반드시 제자의 개인적인 체험이 필요하다. 이러한 신비적인 존재는 샤먼 후보자에게 소명을 받게 되어 있음을 고지하는 징표이다. 즉 준비만 끝나면 계시를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이런 존재를 통하여 샤만 후보자에게 고지되는 것이다.

샤먼 후보자는 새로운 “신비적인 기관들”과 같은 보조영신을 찾으러 떠나기 전에, 혹독한 입문의 시련을 거쳐야 한다. 이를 위해 후보자는 긴 육체적 고난과 정신적인 명상의 단계를 통해 자기 자신을 형해로 관조하는 능력을 얻어야 한다.
라스무센(Rasmussen)으로부터 이러한 정신 수련에 대한 견문을 받은 샤만은 모호한 대답밖에는 하지 못했다.
샤먼들은 왜, 어떻게 그런 능력을 얻게 되는지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그러나 샤먼들은 초자연적인 힘으로 마치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처럼, 자신의 몸에서 살과 피를 분리시키고 오로지 뼈만 남게 할 수가 있다.
그런 다음 샤만은 자기 뼈마디마다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으로 자기 뼈를 불러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서도 샤만은 인간의 언어를 써서는 안 된다. 오로지 스승으로부터 배운 특수하고 신성한 샤만의 언어로만 이 뼈마디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죽으면 썩을 덧없는 살과 피에서 해방된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봄으로써, 샤만은 샤만의 신성한 언어로써 자신을 성별하고 자신이 죽은 다음에도 태양과 풍상에 가장 오래 견딜 수 있는 육신의 바로 이 부분에 걸고 위대한 무업에 몸 바칠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형해상태의 초월적 의미

에스키모 샤먼의 경우, 정신집중이라는 개인적인 노력과 금욕 생활을 통해 형해상태에 도달한다. 그러나 모든 사례에서 이러한 형해상태가 된다는 것 자체가 세속적인 인간 조건의 초월을 의미하며, 이로써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초월이 언제나 신비적인 상태를 결과하는 것은 아니다. 수렵민과 유목민의 정신적 지평에서 뼈는 인간과 짐승의 생명의 원천이며, 한 인간이 형해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은 이러한 원초적인 삶의 자궁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에 해당한다. 즉 갱생과 신비적 재생의 완성을 뜻한다.
한편 그 기원으로 보아, 적어도 그 구조로 보아 불교적 혹은 탄트라(밀교)적인 중앙 아시아의 명상체계 안에서, 형해상태로 환원된다는 것은 금욕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지닌다. 즉 시간의 덧없음을 미리 내다본다는 것, 실체의 관조를 통하여 생명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환원시킨다는 것은, 이로써 모든 행위가 무상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조가 기독교의 신비주의에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사실은, 고대인의 최초의 의식적 깨달음으로써 도달한 궁극적인 것이 하나도 변함없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음을 다시 한번 입증한다. 중앙 아시아 불승(佛僧)들에 의한 형해상태로의 환원과 관련되는 대목에서 다시 한번 검토하게 되겠지만, 이러한 종교적 체험이 내용상 다른 종교적 체험과 다르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어떤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관조적 체험 자체는 동일하다. 말하자면 속의 경계와 개인적인 존재의 조건을 뛰어넘으려는 의지, 초월적인 전망을 획득하려는 욕망은 도처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전존재의 영적인 재생을 획득하기 위한 원초적인 생명으로의 재몰입을 통해서든(불교의 신비주의와 에스키모 샤마니즘에서 그랬듯이) 육신이라는 환상에서의 해탈을 통해서든 이들이 성취하고자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진실”이자 “생명”인 정신적 실존의 원천의 발견이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종족적 입문의례와 비밀결사

죽음과 재생의 의례

우리는 지금까지 몇 차례 “부활”이 전제된 후보자의 “죽음”이 입문의례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것을 확인해왔다.
실제로 한 연령층에서 다른 연령층으로 이행이나 “비밀결사”에의 가입의식은 항상 후보자의 “죽음”과 “재생”으로 요약될 수 있는 일련의 의례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례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로 구성됩니다:

  1. 숲속(초월적인 곳의 상징)으로의 격리: 후보자는 죽은 상태와 다름없는 유충적(幼蟲的)인 실존을 체험합니다. 마땅히 사자(死者)와 비슷(좋은 음식을 먹을 수도 없고, 손가락을 쓰지도 않는다)해야 한다는 전제 아래 부여되는 샤먼 후보자에 대한 금제.
  2. 망령의 낯색 모방: 샤먼 후보자의 얼굴이나 몸에 재 혹은 석회성 물질을 바르거나 창백한 색조의 장의용 가면을 착용합니다.
  3. 상징적인 피장(被葬): 사원 혹은 잡신 사당에서 상징적으로 매장됩니다.
  4. 지하계로의 하강: 지하세계로 상징적으로 내려갑니다.
  5. 최면에 의한 수면: 혼수상태에 빠지게 하는 약물을 복용합니다.
  6. 고통의 시련: 매질을 당하거나, 불 가까이 놓여진 발 때문에 심한 고통을 당하거나, 공중에 매달리거나, 손가락이 절단되거나, 그밖의 잔혹행위를 당하는 등의 견디기 어려운 시련.

이러한 의례와 시련은 후보자로 하여금 과거를 잊게 하기 위해 계획된 것입니다. 이 과정을 체험하고 마을로 돌아온 후보자는 기억이 깡그리 없어진 것처럼, 걷고 먹고 입는 것조차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할 사람처럼 행동하며, 말을 새로 배우고 새 이름으로 행세합니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후보자가 숲속에 있는 동안 죽어서 땅에 묻혔거나 괴물이나 신의 먹이가 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 후보자가 돌아오면 공동체 구성원들은 망령이라도 나타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통과의례의 형태론적 측면

형태론적으로 보면, 통과의례라고 하는 큰 절차는 미래의 샤먼이 겪는 입문의 시련이나 비밀결사에의 입문 의식과 동일합니다. 이러한 의례; 종족적 입문의례와 비밀결사에의 가입의례, 무속적 입문의례는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후보자에 의한 능력의 탐색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점은 공통적입니다.

시베리아와 중앙 아시아의 경우, 연령층 간의 이행을 위한 통과의례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를 확대해석하여 시베리아 입문의례의 기원에 대해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의식의 큰 갈래 (종족적 입문의례와 무속적 입문의례)는 오스트레일리아, 오세아니아, 아메리카에서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경우 모든 남성은 종족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자격을 얻기 위한 입문의례를 치르도록 되어 있고, 또 주의를 위한 별도의 입문의례가 있습니다.
주의를 위한 입문의례는 후보자에게 종족적 입문의례와는 전혀 다른 권능을 부여합니다. 이러한 사례는 성(聖)을 다루는 고도로 전문화된 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유형의 입문의례에서 드러나는 가장 큰 차이는, 종족적 입문의례에서와는 달리 주의의 입문의례에서는 주의를 지망하는 후보자의 내적, 접신적 체험이 근본적으로 중요한 고려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 있다. 주의는 되고 싶은 사람이면 누구나 다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소명을 받아야 가능한데, 이 소명은 후보자에게 예사롭지 않은 접신 체험 능력으로 확인됩니다.
샤마니즘의 이러한 측면이야말로 샤마니즘을 특징 짓는 것이며 종족적 입문의례나 비밀결사 입문의례의 유형과 샤마니즘의 입문의례의 구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불과 요리에 의한 재생 신화

마지막으로 불, 요리(料理) 혹은 해체에 의한 재생의 신화가 샤머니즘이라는 정신적 지평 밖에서도 인간에게 붙어다녔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메데아(Medea)는 자기 손으로 짐짓 삶은 숫양이 회춘하는 모습을 펠리아스(Pelias)의 딸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아버지의 회춘을 바라는 딸들이 저의 아버지 펠리아스를 삶아 죽이게 하는 데 성공한다. 탄탈로스(Tantalos)가 자기 아들 펠로프스(Pelops)를 죽여 신들의 잔칫상에다 올렸을 때, 신들은 그를 솥에다 삶음으로써 펠로프스를 재생시킨다. 그러나 재생된 펠로프스에게는 한쪽 어깨가 없다. 데메테르(Demeter)가 한쪽 어깻살을 먹어버렸기 때문이다. 해체와 요리에 의한 회춘의 신화는 시베리아, 중앙 아시아와 유럽의 민담에도 전승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나 성자들이 대장장이로 등장하는 이야기 역시 이러한 전승에 속합니다.


제3장 무력의 획득

선택과 소명

미래 샤만이 선택되는 가장 흔한 양식 중 하나는 신적 또는 반신적인 존재와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들은 꿈이나 신병, 기타 상황을 통해 나타나 미래 샤만에게 “택함을 입었음”을 고지하고, 새로운 삶의 규범을 따르도록 강권한다. 그러나 조상무의 영혼이 미래 샤먼에게 이런 소식을 전하는 사례도 많다. 그래서 샤만의 선택을 조상 숭배와 관련시켜 추정하는 사람도 있어왔다. 그러나 시테른베리는 미래 샤만에게 이러한 것을 고지하려면 조상무들 역시 아득한 옛날에 신적인 존재로부터 “택함”을 입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부르야트 전승에 따르면, 옛 샤만들은 천상계의 영신들로부터 직접 우트차(utcha: 샤만의 신권)를 받았으며, 미래 샤만이 조상들로부터 이러한 권능을 받는 것은 우리 시대에 들어와서부터이다. 이런 믿음은 극북 및 중앙 아시아에서 볼 수 있는, 샤만의 쇠퇴에 관련된 일반적인 사고방식의 일부가 되어 있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최초의 샤만”은 실제로 말을 탄 채로 구름 사이를 날면서 오늘날의 샤만들로서는 흉내도 내지 못할 기적을 행사했다.

샤만의 기원에 관한 시베리아 신화

어떤 전설은, 오늘날의 샤만이 쇠퇴의 길을 걷는 것은 “최초의 샤만”이 교만하여 신과 겨루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부르야트 전승에서는 “최초의 샤만” 카라-기르갠(Khara-Gyrgan)이 자신은 전지전능하다고 말하자 신은 이를 시험하고자 했다. 신은 소녀의 영혼을 병에 넣고 이를 봉하고 이 소녀의 영혼이 빠져 나가지 못하게 손가락으로 병의 주둥이를 막고 있었다. 샤만은 자기 무고를 타고 하늘로 날아올라가 소녀의 영혼을 발견하고, 이를 풀어주기 위해 거미로 변신하여 신의 얼굴을 물었다. 신은 이에 기겁을 하고 병의 주둥이에서 손가락을 떼자 소녀의 영혼이 도망쳤다. 이에 진노한 신은 카라-기르갠의 권능 중 일부를 빼앗았다. 이 사건 이후로 샤만의 마력은 현저히 줄어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야쿠트 전승에 따르면, “최초의 샤만”은 엄청난 능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고 오만해져 야쿠트의 절대신을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그의 몸은 뒤엉킨 수많은 뱀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신은 불을 보내 그의 몸을 태웠다. 그러자 그 불길 안에서 두꺼비가 한 마리 나왔다. 바로 이 두꺼비에서 나온 것이 “악마”인데, 바로 이 악마가 야쿠트 인들에게 뛰어난 여무(무(巫)와 남무(격(覡)을 보내준다는 것이다.

투르칸스크의 퉁구스 전승에서는 “최초의 샤만”이 악마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을 창조했으며, 자기 천막에 난 구멍을 통해 날아 나갔다가 수많은 백조들과 함께 돌아왔다고 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란의 영향에서 유래한 듯한 이원론적 개념을 접하게 된다. 이런 종류의 전설은 오히려 지하계와 ‘악마’만 상대한다고 여겨지는 “흑 샤만”의 기원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샤만의 신화적 기원

그러나 대부분의 샤만의 기원과 관련된 신화는 신들이나 신들의 대리자로서의 독수리와 태양의 새를 등장시키고 있다.

다음은 부르야트 인들의 이야기 중 하나다.
태초에 신들(텡그리(tengri))은 서쪽에만 있었고, 악령들은 동쪽에만 있었다. 신들은 인간들을 창조했는데, 인간들은 악령들이 온 땅에 질병과 죽음을 퍼뜨리기 전까지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그런 시대가 끝나고 악령의 행패가 극심해지자 신들은 인간에게 샤만을 보내어 질병과 죽음에 맞서 싸우게 하고자 했다. 그래서 신들은 독수리를 보냈다. 그러나 인간은 독수리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했고, 새에 불과한 독수리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독수리는 신들에게 되돌아가 인간의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던지, 인간에게 부르야트 샤만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신들은 이 독수리를 다시 인간의 땅으로 내려 보내면서 지상에서 처음 만나는 인간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를 샤만으로 세우라고 명했다. 지상으로 돌아온 독수리는 나무 밑에서 자고 있는 여자를 발견하고 그녀와 교접해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이 최초의 샤만이 되었다. 또 다른 전승에 따르면, 독수리와 교접한 뒤 이 여자는 영신들을 만나 스스로 무녀가 되었다.
다른 전설에서 독수리의 출현을 샤만이 소명을 받았다는 징표로 해석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한 부르야트 소녀는 발톱으로 양을 채어 날아가는 독수리를 보고 자신이 소명을 받았음을 깨달아 무녀가 되었다. 이 무녀의 경우 성무과정은 7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이 무녀는 죽어서 사얀(sayan: 영신, 우상)이 되어 지금도 악령들로부터 아이들을 지켜준다고 믿어진다.

투르칸스크의 야쿠트인들도 독수리가 최초의 샤만을 창조했다고 믿는다. 독수리 역시 지상적인 존재, 아이(Ai, 창조자) 또는 아이 토욘(Ai Toyon, 빛의 창조자)이라 불린다. 아이 토욘의 자식들은 세계수의 가지에 앉아 있는 조령신(bird-spirit)으로 표현되며, 가지 꼭대기에 앉아있는 쌍두 독수리, 토욘 쾨퇴르(Toyon Kotor: 새들의 주)는 아이 토욘 자신을 나타내는 듯하다. 시베리아의 여러 종족과 마찬가지로 야쿠트족도 독수리와 성수(聖樹), 특히 자작나무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
아이 토욘은 샤만을 창조하면서 천상에 있는 자기 삶터에 가지가 여덟인 자작나무를 한 그루 심고, 창조자의 자식들이 깃들일 둥지도 이 나뭇가지 위에 두었다. 이때 그는 지상에도 세 그루의 나무를 더 심었다. 샤만에게는 자기 삶을 의지 하는 나무가 있는데, 샤만은 바로 이 나무들에 대한 기억을 통해서 그런 나무를 상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샤만이 입문의례적인 꿈을 통해 꼭대기에 세계의 주가 있는 우주수(宇宙樹)로 갔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한다. 절대자는 독수리의 형상으로 나타나거나, 미래 샤만의 영혼인 우주수의 가지에 깃든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신화적 심상(心象)은 고대 오리엔트적 조형(組型) 그대로인 것으로 보인다.
야쿠트 인의 경우 독수리는 대장장이와도 관계가 있다. 이로써 미루어보건대 대장장이의 기원과 샤만의 기원은 같은 것 같다.

예니세이 오스티야크족(Yenisei Ostyak), 텔레우트족, 오로콘족(Orochon) 등 여러 시베리아 종족들은 최초의 샤만이 독수리로부터 태어났거나 적어도 독수리로부터 무업을 배운 것으로 전한다.
우리는 샤만의 성무의례에서 독수리가 맡은 역할과, 주술적으로 샤만을 독수리로 변형시키는 샤만의 의상이 지니는 조형(鳥形)문양적 요소를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들은 천상계의 신적인 존재와 세계의 중심(세계수)으로의 주술적 비행이라는 관념을 반영하 복합적인 상징체계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강조해두어야 할 것은 샤만이 택함을 얻는 과정에서 조상영신들의 역할은 사실상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점이다. 조상들은 독수리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절대자에 의해 창조된 신화적 “최초의 샤만”의 자손들에 지나지 않는다. 샤만의 소명이 조상영신들에 의해 정해진다는 사실은 신화시대 이래의 초자연적인 소식이 조상영신들에 의해 전해진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비밀의 언어”-“동물의 언어”

미래의 샤만은 성무 과정에서 무의때 사용할 비밀의 언어, 즉 신어(神語) 또는 공수(貢壽)를 습득해야 합니다. 이 비밀의 언어를 통해 샤만은 영신이나 동물영신들과 소통합니다. 샤만은 스승으로부터 배우기도 하고, 스스로 영신들로부터 직접 전수받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에스키모 샤만은 이 두 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합니다. 비밀의 언어는 랩 인, 오스티야크 인, 추크치 인, 야쿠트 인, 퉁구스 인 등의 샤만들에게도 존재합니다. 퉁구스인 샤만은 접신 중 모든 언어를 이해한다고 믿어지며, 에스키모의 경우, 비밀의 언어는 고도로 발달한 언어인데, 앙가쿠트와 영신들 간의 소통 수단으로 사용됩니다.
샤만에게는 그 나름의 독특한 무가가 있다. 이들은 이러한 무가를 통하여 영신들에게 기도한다. 이 비밀의 언어가 직접 문제 되지 않는 지역에도 이러한 언어의 흔적은 아직도 남아 있다. 알타이 인의 경우에도 샤만이 무의중에 반복하는 언어에 이런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북아시아나 극북지방에도 이런 현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현상은 세계 도처에서 발견됩니다. 예를 들어, 세망 피그미 족(Semang Pygmy)의 할라(hala)는 체노이(Cenoi: 천상계의 영신들)의 언어로 체노이와 대화하지만, 무의가 베풀어지는 천상계 영신들의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잊어버린 척합니다. 멘타웨이 족(수마트라)에서는 입문의례 집행자가 의례 당사자의 귀에 대나무 막대기를 꽂고 입김을 불어넣어 영신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합니다. 바타크 족 샤만은 무의 중에 영신들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두순 족(Dusun: 북보르네오)의 무가는 비밀의 언어로 되어있다. 카리브 인의 전승에 따르면, 최초의 피아이 (샤만)는 강물 속에서 노랫소리가 들리자 이 물 속으로 뛰어들어 여영신들이 부르는 이 무가를 모두 외고 무구를 받은 연후에야 강물에서 나왔다.

이러한 비밀의 언어는 “동물의 언어”이거나 동물의 소리에서 기원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남아메리카 샤만 후보자는 입문의례 기간에 짐승의 소리를 흉내내는 방법을 익히며, 북아메리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포모 족과 메노미니 족 샤만은 새들의 노래를 흉내내고, 야쿠트 인, 유카기르 인(Yukagir), 추크치 인, 골디 인, 에스키모 인 등의 샤만 무의에서는 짐승의 울음소리, 새의 소리가 들립니다. 키르기츠-타타르 인(Kirgiz-Tatar)의 박사는 천막 안에서 뛰어다니고 소리를 지르며, 개처럼 짖으면서 구경꾼들의 냄새를 맡기도 하고 황소처럼 울며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양처럼 울고 돼지처럼 꿀꿀거리며 새처럼 우는 등 아주 정확하게 짐승의 울음소리, 새 우는 소리와 나는 소리 등을 모방하여 구경꾼들을 사로잡습니다. “영신들의 내림 (강신(降神))”은 대개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다. 기아나의 인디언들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고함소리와 절규로 영신의 강림을 알립니다. 이러한 소리는 이따금씩 그 크기가 줄어드는 일이 있을 뿐, 대개 여섯 시간 동안 끊어지는 일 없이 계속해서 들려온다.
샤만은 동물의 흉내를 냄으로써 영신이 내린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무의중에 샤먼이 쓰는 언어의 상당수는 새나 다른 짐승의 울음소리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레티살로가 지적하고 있듯이, 샤만은 무고와 “가성 (假聲)”을 이용해서 접신상태에 도달합니다. 뿐만 아니라 샤만은 어디에서건 주술적인 가사를 노래한다.
주술과 노래는 같은 언어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문이라는 뜻의 독일어 ‘갈드르(galdr)’는 ‘노래하다’라는 뜻을 가진 ‘갈란(galan)’이라는 동사에서 유래하며, 이는 특히 새들의 지저귐을 의미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동물, 특히 새들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자연의 비밀을 배우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샤만이 예언 능력을 얻게 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샤만은 뱀이나 이와 비슷한 주력을 가진 동물을 잡아먹음으로써 새들의 언어를 배운다. 사람들이, 이런 동물이 미래의 비밀을 샤만 앞에 드러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바로 이러한 동물에 사자령이 깃들여 있고 따라서 신들이 이러한 사자령을 통하여 드러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들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저승과 천상계와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얻는것입니다.

샤만과 동물, 특히 새와의 동일시가 이루어지며, 새들은 영혼의 안내자이다. 스스로 새가 되었다는 것 혹은 새와 함께 한다는 것은 살아 있으면서도 천상계와 저승으로 접신적인 여행을 할 능력을 얻었음을 뜻한다. 무의중에 이러한 동물이 내는 소리를 흉내낸다는 것은 샤만이 세 우주권, 즉 지하계와 지상계와 천상계를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는 징표입니다. 즉 이로써 샤만은 사자들이나 신들만이 드나들 수 있는 이 길을 자유자재로 왕래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무의중에 동물을 체현(體現)하는 것 역시 신들림 현상의 일종이기는 하나 샤만이 그 동물로 주술적으로 변신하는 것에 비하면 급이 낮은 신들림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샤만은 다른 방법을 통해서 이와 유사 하게 변신할 수 있다. 가령 무복을 입거나 얼굴에 가면을 씀으로써 이와 유사하게 변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수많은 전승에서 동물과의 친교, 동물의 언어 해득은 낙원 지향적 증후를 보인다. 태초의, 즉 신화시대의 인간은 동물과 평화롭게 공존하며 동물의 언어를 이해했다. 그러나 인간은 성서에서 말하는 “타락의 시대”에 견주어질 수 있는 원초적인 파국의 시대를 맞으면서 오늘날과 같은 상태, 말하자면 세월이 지나면 죽어야 하고 성적인 갈등에 시달려야 하고 살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하고 동물에게 적의를 품어야 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접신상태에 들 준비를 하면서 그리고 접신의 경지에서, 샤만은 현재의 인간 조건을 파기하고 한동안이나마 태초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동물과의 친교, 동물의 언어 해득, 동물로의 변신은 샤만이 저 아득한 시대에 인간이 상실한 ‘낙원적’ 상황을 재현하는 것입니다.


제5장 무복과 무고의 심벌리즘

샤먼의 무복은 그 자체로서 종교적인 히에로파니(거룩한 것의 드러남, 곧 성현)와 코스모그래피(cosmography: 우주형상지, 宇宙形狀誌)를 이룬다. 무복은 거룩한 것의 임재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우주적 상징과 형이상학적 도정을 계시하기도 한다. 주의 깊게 연구하면 이 무복은, 무속 신화나 그 기술은 물론이고 무속 체계의 정체까지 드러나게 한다.

무복은 샤만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 주위의 속계(俗界)와는 다른 종교적인 소우주가 되었음을 나타낸다. 한편으로 이 무복은 거의 완벽한 상징체계를 구성하고, 다른 한편으로 무복에 의한 성별이 그 공간을 갖가지 영력과 “영신들”로 채우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무복을 입는다 – 혹은 무복을 대신하는 것을 몸에 지닌다 – 는 단순한 몸짓을 통해서 샤먼은 속계를 넘어 영계와 접촉할 준비를 갖추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이 준비 과정 자체가 영계와의 구체적인 접촉일 때가 많다. 그 까닭은 샤만은 복잡한 예비 과정을 거친 뒤에, 그러니까 탈혼망아에 들기 직전에 무복을 입기 때문이다.

알타이의 무복

알타이 샤만에 대한 포타닌의 글을 읽어보면, 다른 시베리아 샤만의 경우에 비해 알타이 샤만의 무복은 형태가 완벽에 가깝게 또 휠씬 좋은 상태로 보존되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알타이 샤만의 카프탄은 염소가죽이나 순록가죽으로 만들어진다. 카프탄 자락에 달려 있는 수많은 댕기나 수건은 뱀을 상징한다. 실제로 이들 뱀 가운데 일부는 두 눈을 뜨고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뱀의 머리 모양을 제대로 갖추고 있기도 하다. 이런 뱀 중 큰 뱀은 꼬리가 여럿이다. 그러니까 몸은 셋인데 머리는 하나뿐인 뱀도 있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샤만은 무복에다 이런 뱀 모양을 1,070개나 매달고 다닌다고 한다.

무복에는 쇠붙이 장식도 많이 달려 있다. 영신들을 겁주기 위한 모형 활과 화살도 달려 있다. 이 샤만들이 걸치는 치마 뒤에는 동물의 가죽과 함께 두 개의 구리 원반이 붙어 있다. 웃깃에는 올빼미의 검은 깃과 갈색 깃으로 만든 가장자리 장식이 있다. 한 샤만의 옷깃에는 일곱 개의 인형이 매달려 있는데, 이 인형의 머리도 갈색 올빼미의 깃으로 되어 있다. 이 샤만은 일곱 개의 인형은 천상에 있는 일곱 동정녀, 일곱 개의 방울은 영신들을 부르는 일곱 동정녀의 목소리라고 설명한다. 이 동정녀의 수가 아홉이 되는 지역도 있다. 이런 곳에서는 이 아홉 동정녀가 바이 윌갠의 딸 아홉 자매라고 믿어진다.

샤만의 옷에는 이 밖에도 많은 것들이 매달려 있다. 물론 이런 것들에는 나름의 종교적 의미가 있다. 가령 알타이 샤만의 무복에는 에를릭 칸의 왕국에 산다는 두 마리의 꼬마 괴물 모양이 있다. 하나는 주트파(jutpa), 또 하나는 아르바(arba)이다. 주트파는 검은색 혹은 갈색 천으로 만들고 아르바는 초록색 천으로 만든다. 다리가 네 개이고 꼬리가 있고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은 둘 다 마찬가지이다. 시베리아 극북지방으로 가면 무복에 갈매기나 고니 같은 물새들의 모양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새들은 샤먼의 해저에 있는 저승 세계로의 여행을 상징한다.

샤만의 거울

북만주의 여러 퉁구스 민족군(퉁구스, 킹간(Khingan), 비 라르첸 등)의 샤만들은 구리거울을 매우 중요한 도구로 사용한다. 이 거울은 중국-만주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이 분명하나, 그 주술적 의미는 민족마다 다르다. 거울은 샤만으로 하여금 “세상을 보게 하는 데”(즉, 세상에 정신을 집중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는 해석도 있고, “영신들의 거처”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해석도 있다. 또는 인류의 욕구를 투사시키기 위한 도구라는 해석도 있다.

디오제기(V. Dioszegi)에 따르면, 거울을 뜻하는 만주-퉁구스 어 ‘파나프투(panaptu)’는 ‘파나(pana)’, 즉 “영혼, 영신,”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영혼-그림자”에서 파생한 말이다. 따라서 거울은 “영혼-그림자”의 그릇(프투(-ptu))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 거울을 들여다봄으로써 샤만은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볼 수 있다. 몽고 샤만들 중에는 거울 속에서 “샤만의 백마”를 보는 경우도 있다. 준마는 아주 괄목할 만한 무속적 동물로, 준마의 질주와 그 눈부신 속도는 “비행,” 즉 접신 이미지의 전통적인 표현이다.

새(鳥)모양의 심벌리즘

무복이 장식물을 통해 샤만에게 새로운, 동물 모양의 주술적인 모습을 부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동물 모양 중 가장 전형적인 세 가지는 새 모양, 순록(수사슴) 모양, 곰 모양인데, 이 중 가장 특별한 것은 새 모양의 장식입니다.
여기에서는 새 모양을 닮은 무복에 대해서만 생각해보기로 하자. 무복 이야기가 나오면 새의 깃털 이야기는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샤만들은 의상 자체의 구조를 되도록 새 모양과 비슷하게 꾸미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알타이, 미누신스크 타타르 (Minusinsk Tatars), 텔레우트, 소요트, 카라가스 샤만은 저희 무복울 되도록이면 올빼미와 비슷하게 꾸민다. 소요트 샤만의 무복은 완전히 새 모양을 그대로 본뜬 것으로 보인다. 가장 자주 모방의 대상이 되는 새는 독수리이다. 골디 인의 경우에도 샤만의 무복 중 가장 많은 것이 새 모양을 흉내낸 무복이다. 이보다 북쪽 지역에 사는 시베리아 인들, 즉 돌간 인, 야쿠트 인, 퉁구스 인도 마찬가지이다. 유카기르 인 샤만의 무복에도 새의 깃털이 등장한다. 퉁구스 샤만의 구두는 새의 발과 흡사하다. 가장 복잡한 새 모양의 무복을 만들어 입는 사람들은 바로 야쿠트 샤만들이다. 이들의 무복은 쇠로 만든 새의 형해꼴을 하고 있다. 쉬로코고로프의 설명에 따르면, 새 모양의 의상이 가장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곳은 오늘날 야쿠트 인들의 집단 거주지역이다.

심지어는 의상에 새 모양이라고 말할 수 있는 뚜렷한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지역, 예를 들어 중국-불교 문화의 영향을 받은 만주지역에서도 샤만의 모자만은 깃털로 새 모양을 흉내내어 만든다. 몽고의 샤만이 입는 무복의 어깨에는 실제로 “날개”가 달려 있다. 그래서 샤만은 이 무복을 입는 순간부터 자신이 새가 된 것으로 느낀다. 옛날에, 이 새 모양을 흉내낸 의상은 알타이 인의 거주지역 전체에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올빼미 깃털은 카자크-키르기츠 인 박사의 지팡이에 꽂히는 정도에 그친다.

의상의 상징성과 역할

퉁구스 인 자료 제공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쉬로코고로프는 새 모양의 의상은 샤만이 다른 세계로 날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무구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의상이 가벼우면 가기가 훨씬 수월하다.” 전설에 나오는 무녀가 주술적인 날개를 얻으면 그 즉시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올마르크스는 이러한 종교 복합의 진원지는 극북지방이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샤만을 도와 공중 여행을 가능케 하는 “보조영신’ 신앙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수차례 보아왔고 앞으로 보게 될 것이지만, 이러한 공중 비행의 심벌리즘은 샤먼, 요술사, 때로는 인격화하는 신화적인 존재와 관련해서 세계 도처에서 발견된다.

독수리와 샤먼의 관계

여기에서 독수리와 샤만 사이의 신화적인 관계도 반드시 한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최초의 샤만의 아버지인 독수리가 샤먼의 성무의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세계수와 샤만의 접신 여행을 포함하는 신화적 복합에서 중심 상징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와 더불어 모습이 상당히 달라지기는 해도 바로 이 독수리가 어떤 의미에서는 절대자를 상징한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모든 신화적 요소는 샤만의 의상이 지니는 종교적 의미를 상당한 수준까지 정확하게 밝혀주고 있는 듯하다. 말하자면 샤만은 이 의상을 입음으로써 통과의례와 접신 체험이 계속되는 동안에 계시되고 수립된 신화적인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샤만의 가면

야로슬라프의 대주교 닐은, 부르야트 샤만의 무구 가운데 무시무시한 가면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 부르야트 샤만에게서도 이러한 가면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시베리아나 북아시아에서도 이러한 가면이 쓰이는 일은 점차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쉬로코고로프는 퉁구스 샤만이 “말라(mala)의 영신이 자기에게 와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 즉석에서 가면을 만드는 하나뿐인 사례를 들고 있다.
추크치인, 코리야크 인, 캄차달 인(Kamchadal), 유카기르 인, 야쿠트 인의 샤마니즘에서 가면은 별로 쓰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가면은 가끔씩 어린아이들을 겁주는 데 쓰이거나, 장례식 때 사자령들의 눈을 피하는 데 쓰일 뿐이다. 에스키모 가운데에서도 아메리카 인디언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알래스카의 에스키모 샤만들만이 가면을 사용한다.

아시아에서도 몇몇 사례가 보고되고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사례는 남아시아에 국한된다. 흑 타타르 샤만은 가끔 자작나무 껍질로 만들고 여기에다 다람쥐 꼬리로 수염과 눈썹을 만들어 붙인 가면을 사용하며, 톰스크의 타타르인도 마찬가지이다.

얼굴에 기름 바르기

알타이 지역과 골디 인의 경우, 샤만은 사자의 영혼을 유령의 나라로 인도할 때, 영신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얼굴에 우지(牛脂)를 바른다. 이는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풍습으로, 곰 희생제 때에도 같은 목적으로 얼굴에 우지를 바르기도 한다.
이와 관련해서 얼굴에 기름을 바르는 풍습은 특히 “미개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풍습이라는 사실에 유념해둘 필요가 있다.
문제는 그 의미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이들이 영신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또는 영신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이런 행위를 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얼굴에 기름을 바르는 행위의 의미는 단순히 영신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또는 영신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이는 영신들의 세계에 들기 위한 주술적인 준비에 따르는 기본적인 기술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세계의 많은 곳에서 가면은 조상들을 상징하며, 가면을 쓴 사람은 조상의 화신으로 믿어집니다. 얼굴에 기름을 바르는 행위는 가면을 쓰는, 즉 사자의 영혼으로 화신하는 가장 간단한 행위로 여겨집니다.

이 가면을 쓰는 행위를 남성들만의 비밀결사와 조상 제사와 관련시키는 곳도 있다. 역사-문화적 연구결과에 따르면, 가면, 조상 제사, 통과의례를 치르는 비밀결사로 이루어진 복합적인 현상은 여가장제(matriarchy) 문화에 속한다. 그러니까 남성만의 비밀결사는 여성우위 문화에 대한 반동이라는 해석이다.

샤만의 의상과 가면

샤만의 의상 자체가 가면의 역할을 하며, 이 의상이 원래 가면에서 유래했다는 하르바의 지적은 적절해 보입니다.
시베리아 샤머니즘이 오리엔트에서 유래한 것임 – 따라서 최근에 정립된 것임 – 을 밝히려는 시도가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가면이 남아시아에서는 자주 쓰이는데 북아시아로 올라갈수록 그 사용 빈도가 줄었다가 극북지역에 이르러서는 아주 없어져버린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기원”을 논의하는 것이 우리의 의도는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북아시아와 극북지방 샤마니즘에서 의상과 가면은 따로따로 중요시되어 왔음은 지적해두어야 할 듯하다.

가면이 샤만의 정신통일에 큰 도움을 준다고 믿는 지역도 있다. 우리는 다른 사례에서 샤만의 눈이나 얼굴을 가리는 수건이 비슷한 역할을 맡고 있음을 본 적이 있다. 역할에 대한 적절한 언급이 없어도 가면과 그 성격이 같은 무구가 쓰이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가령 골디 인과 소요트 인의 경우, 샤만은 모피나 수건으로 머리를 모두 가리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리고 접신술이나 제의에서 부여되는 갖가지 가치를 따져볼 때, 가면은 샤만의 의상과 같은 역할을 하고 이 두 가지 무구의 역할은 상호 전환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 까닭은, 어디에서 사용되든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속이 아닌 곳에서 쓰여지든) 가면은 신화적 인간(조상, 신화적인 동물, 신)을 표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의상은 모두 사람들 앞에서 샤만을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초자연적인 존재로 바꿔놓는다. 이렇게 바뀐 존재가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바로, (형해를 통해) 되살아난 사자의 위광이고, (새를 통한) 비행능력이고, (여장, 여성적 속성을 통한) “천상의 배우자”의 지아비라는 지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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