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라 계보도 – 경주김씨 계림군파

신라(新羅, Silla)

신라는 기원전 57년에 건국되어 936년까지 약 992년간 지속된 한국의 고대 왕국입니다. 진한의 사로국에서 시작해 삼국시대, 통일신라, 후삼국시대를 거쳤습니다.
신라는 한반도 남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삼국을 통일하고 통일신라 시기를 통해 정치, 문화, 경제적으로 큰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특히 불교의 융성과 화려한 문화유산을 남겨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경주 김씨는 신라 왕족의 대표적인 성씨로, 경주를 본관으로 하며, 김알지를 시조로 합니다.

신라의 건국과 멸망

  • 건국: 기원전 57년 6월 8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는 기원전 57년에 건국되었습니다.
  • 멸망: 서기 936년 1월 13일. 일반적으로 935년으로 알려져 있지만, 신라 왕족이 제후왕 신분을 완전히 잃은 날은 936년 1월 13일입니다. 실제 항복과 경순왕의 개성 입조는 935년 11월에 이뤄졌습니다.
    • 을미(乙未)년 기축(己丑)월 임신(壬申)일로, 음력 935년 12월 12일, 율리우스력으로는 936년 1월 8일이다.
    • 신라의 합병 연도를 일반적으로 935년이라고 하지만, 《고려사》에 의하면 왕건이 공식적으로 신라 합병을 결정하고, 경순왕과 신라 왕족이 제후왕 신분을 완전히 잃는 날은 12월 12일인데, 이를 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변환계산 시스템을 이용해 현대에 쓰이는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하면 해를 넘겨 936년 1월 13일 금요일이 된다.
    • 다만, 실제 항복과 경순왕의 개성 입조는 935년 11월에 이뤄졌고 이게 936년 1월까지 미뤄진 건 경순왕이 귀부를 요청하고 왕건이 거절하기를 반복하는, 예의상 인사치레를 한 달 동안 했기 때문이다.
  • 신라의 국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 선도산성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신라의 시대 구분

  1. 진한 사로국: 신라의 초기 단계로, 진한의 여러 소국 중 하나였습니다.
  2. 삼국시대 신라: 고구려, 백제와 함께 삼국시대를 이끈 주역 중 하나입니다.
  3. 통일신라: 676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하여 한반도의 대부분을 지배했습니다.
  4. 후삼국시대 신라: 통일신라의 말기로, 후백제와 후고구려가 다시 등장하여 후삼국시대가 전개되었습니다.

신라의 국호

  • 초기 국호: 사로, 사라, 신라 등 다양한 표기가 사용되었습니다.
    • ‘신라’에 해당하는 고유어 음을 한자를 빌려 나타냈기 때문에 ‘사로(사로국)’, ‘신라’, ‘사라’ 등 여러 표기가 혼용되었다. 따라서 진한 12소국 시기의 사로국을 ‘신라국’이라고 해도 완전히 같은 말이다.
  • 통일 국호: 503년에 국호를 ‘신라’로 통일하였습니다. ‘계림’이라는 별칭도 사용되었습니다.
    • 건국 신화의 발원지이자 신라인의 정신적 구심점인 ‘계림’이 곧 신라 전체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기도 했다(계림대도독부 등). 계림은 심지어 신라가 고려에 합병된 뒤에도 조선시대까지 한반도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수도

  • 서라벌(금성,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신라의 수도는 고구려, 백제와 달리 수도의 변동이 없었습니다. 신문왕 때 달구벌(대구)로 천도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귀족의 반발로 무산되었습니다.

국조 (추정)

  • : 신라 건국 신화에 계룡이나 백마, 김알지 설화와 신라의 국호(계림(김알지), 계괴, 유괴 등)에서 닭이 많이 등장한다.

종족

  • 예맥인: 고조선 멸망 이후 삼한으로 이주한 예맥계 유이민들.
    이들 중 일부가 경주 분지 일대에 정착해 신라를 세웠다. 진흥왕 대에 고구려와 백제를 상대로 펼친 전쟁에서 흡수한 인구와 포로도 다수 포함된다.
  • 진한인: 파사 이사금 시기 등 신라가 진한 소국들을 정복하며 흡수한 원삼한 계통의 주민들이 포함되었습니다.

종교

  • 토속 신앙 → 불교 (통일신라 시기 교종에서 선종으로 발전했습니다.)

국성

  • 박(朴): 밀양 박씨
  • 석(昔): 경주(월성) 석씨
  • 김(金): 경주 김씨

신라의 역사, 본관

경주(慶州)는 경상북도(慶尙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慶尙北道 慶州市)를 뜻한다.

  • 기원전 57년: 6촌(村)이 연합하여 고대 국가를 형성하고 국호를 서라벌(徐羅伐)·사로(斯盧)·사라(斯羅)라 하였습니다. 수도는 금성(金城)이라 불렀습니다.
  • 65년 (탈해왕 9년): 시림(始林)에서 김씨의 시조 김알지(金閼智)가 탄생하였습니다. 이 사건 이후 국호를 계림(鷄林)으로 변경했습니다.
  • 307년 (기림왕 10년): 최초로 국호를 신라(新羅)로 변경했습니다.
  • 935년 (고려 태조 18년):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敬順王)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였습니다. 경순왕이 항복한 후 경주(慶州)로 개칭하고 식읍으로 주고 그를 사심관으로 삼았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경주라는 명칭이 생겼습니다.
  • 이후 변화: 동경(東京), 낙랑군(樂浪郡), 계림부(鷄林府) 등으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 1413년 (태종 13년): 경주로 다시 개칭되었습니다.
  • 1415년: 병마절도사영을 두었다가, 1417년 울산(蔚山)으로 이전하였습니다.
  • 1895년(고종 32): 군면 폐합으로 경주군이 되고
  • 1955년: 경주읍과 내동면 전역, 천북면과 내남면 일부가 통합되어 경주시(慶州市)로 승격되었습니다.

경주 김씨의 계보

신라의 수도였던 경상북도 경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삼국시대와 남북국시대에 존재했던 국가인 신라와 태봉의 왕성이다. 경주 김씨는 신라의 시조 김알지를 시조로 삼고 있습니다. 김알지는 65년 시림에서 발견되어 금궤에서 나왔다고 전해지며, 이로 인해 ‘김(金)’씨를 사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김알지의 후손들은 신라의 여러 왕으로 이어지며 왕조를 형성했습니다.

경주 김씨의 시조는 신라의 추존왕 김알지이다. ‘김(金)’이라는 성씨는 그가 제4대 탈해 이사금 시절에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설화적 성격이 짙으므로 많은 학자들로부터 신뢰받지 못하고 있으며, 실제로 김씨를 사용한 것이 확인되는 첫 국왕은 제24대 진흥왕입니다. 최초의 김씨 국왕은 제13대 미추 이사금이며, 제17대 내물 마립간 때에 김씨 왕조 지배의 기틀이 잡혔습니다.

진흥왕 이전에는 김씨 가문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진흥왕 이전에도 혈족의 계보는 계속 이어져 왔지만, ‘김'(金)이라는 한자를 이름 앞에 붙이는 ‘성’으로서 사용한 것은 이때에 처음으로 검증된다는 것이다. 한자 사용이 유행하면서 한자 성씨를 쓴 것은 김씨뿐만 아니라 다른 성씨들도 마찬가지이다.

  • 시조와 역사
    • 김알지 (제4대 탈해 이사금 시절에 금궤에서 나왔다고 전해짐.)
    • 김알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 미추 이사금 (제13대 왕)
    • 내물 마립간 (제17대 왕, 김씨 왕조의 기틀을 잡음)
    • 진흥왕 (제24대 왕, 김씨 성씨를 공식적으로 사용)
    • 신라인들은 김씨의 시조를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로 여겼음.
    • 신라 멸망 후 경주 김씨는 고려의 귀족으로 편입됨.

신라인들은 경주 김씨의 시조를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로 여겼으며, 이는 《삼국사기》와 <김인문 묘비> 등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삼국사기
    • 신라고사(新羅古事)에 금궤(金櫃)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김씨로 성을 삼았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 신라인은 스스로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손(後孫)이라고 하였다.
  • 김인문묘비
    • 소호(少皥)는 ▨허(▨墟)하여 별빛을 나누고 시퍼런 바다를 뛰어 넘었으며, 금천(金天)은 …태조(太祖) 한왕(漢王)은 천년의 ▨을 열고, ▨성(▨聖)은 백곡(百谷)의 ▨에 임하셨다.
  • 또한 태조 성한왕이라는 인물이 <김인문묘비>와 <문무왕릉비>, <흥덕대왕비문>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며, 투후 김일제도 김씨 성과 연관이 있다고 여겼다. 학계에서는 태조 성한을 김알지 또는 김알지의 아들 김세한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소수설로 최초의 김씨 임금인 미추 이사금을 지칭한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경주 금씨

  • 고려 시대까지 경주 김씨와 김해 김씨는 금씨로 불렸음.
  • 몽골 속국 시기에 김씨로 바뀜.

사실 김씨라는 한자 성을 사용하는 인구는 중국과 만주 등 동아시아 지역에 매우 폭넓게 분포하고 있다. 금나라의 금이라든지, 중국 성씨 중에 금씨는 우리나라의 김씨와 깊은 연관이 있다. 김씨는 고려 때까지 금씨로 불렸는데, 음양오행에 따라 이씨 조선을 무너트릴 것이라는 불길한 소문을 염두에 둔 태조(이성계)의 명으로 쇠금이 아닌, 성김으로 바꿔 부르게 된 것이다.

경주 김씨와 경순왕의 관계

경주 김씨는 이후 고려와 조선 시대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경주 김씨의 후손들은 경순왕을 시조로 모시는 여러 파로 나뉘었습니다.

신라가 경순왕을 끝으로 멸망하자 경주 김씨는 고려의 귀족으로 편입되었습니다. 왕실과 달리 일반적인 귀족은 족보를 알 수 없었으며, 경주 김씨도 마찬가지로 시간이 지나면서 후손들의 소목이 잊혔습니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 병역 면제 등의 혜택을 타내기 위해 경순왕의 후손들에 대한 위조가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경순왕은 서자를 포함하여 아들을 셋 두었으나, 경주 김씨의 대부분 파들은 족보에 경순왕의 후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려는 평화적으로 신라를 흡수하였지만, 지방 호족의 상당수는 분봉되었던 경주 김씨의 세가 많았기 때문에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또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경주 김씨와 결혼하는 것이 고려 전기의 양상이었습니다. 경주 김씨의 계파들과 경주 김씨 계열 성씨들은 분봉되거나 파견되어 지역의 호족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고려는 이런 상황 속에 왕권의 정당성을 보강하려는 노력을 했던 것이고, 왕씨의 고려를 멸망시킨 조선도 경주 김씨를 회유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조선 초기에 경순왕의 후예는 부역과 군역을 면제해주었기 때문에, 경순왕의 후대가 아니었던 각 지방 호족 출신 경주 김씨들도 경순왕의 후예라 주장하며 족보를 만들었습니다. 현재 많은 경주 김씨 계파가 경순왕의 후예라고 족보에 기록해두었습니다. 경순왕의 후예는 극히 일부이며, 대부분은 파견되거나 분봉된 경주 김씨들로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경순왕의 후예로 자칭하는 일과 경주김씨 인구가 많기때문에 족보를 샀다라는 말이 돌았는데 앞서 말한대로 경주 김씨는 인구가 늘어날수밖에 없는 혜택과 지방권력을 각 계파들이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이들을 단순히 경주 김씨 하나로 묶기보단
신라확장기의 성과 고분군에 따른 밀집 지역으로 이들의 계파의 조상을 추측해볼수 있다.

다른 본관과의 관계

천년간 신라의 수도로 기능했던 월성은 이후 경주의 별칭으로 쓰였기 때문에, 경주 김씨는 월성 김씨(月城 金氏)라고 불리기도 하며, 경주 김씨 인물의 본관이 가족관계등록부상에는 월성(月城)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월성 김씨는 경주 김씨와 같은 씨족으로 대우받으며 시조와 왕릉에 제사도 같이 올립니다.


김알지의 탄생 신화

  • 65년 탈해 이사금이 밤에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에서 닭 울음 소리를 듣고 신하 호공을 보내 확인하게 했다.
  • 금빛의 작은 함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다고 보고받자, 탈해 이사금이 직접 가서 함을 열어보니 용모가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나왔다.
  • 이때부터 시림을 계림(鷄林)이라 부르고, 아이는 금함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다.

초기 세보

  • 부인: 마정부인(摩貞夫人), 석강조(昔康造)의 딸
  • 삼국사기: 알지 → 세한(勢漢) → 아도(阿道) → 수류(首留) → 욱보(郁甫) → 구도(仇道) → 미추 이사금(金味鄒尼師今)
  • 삼국유사: 알지 → 열한(熱漢) → 아도(阿都) → 수류(首留) → 욱부(郁部) → 구도(俱道 또는 仇刀) → 미추 이사금(金味鄒尼師今)

주요 설화 및 사료

  • 김알지의 탄생 신화는 박혁거세의 출생과 유사하게, 신비로운 기운과 상서로운 징조가 동반된 신화로 전해집니다.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김알지가 신라 김씨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의 7대손 미추가 최초로 왕에 올랐다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김알지가 세조로 추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신라 김씨의 시조 출현과 관련된 전설을 나타냅니다.
  • 문무왕릉비와 흥덕왕릉비 등의 금석문에서는 성한(星漢)을 김씨 왕조의 시조로 언급하고 있으며, 이는 김알지와 동일 인물로 보기도 합니다.

성한(星漢)은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로 추정되는 인물로, 성한왕(星漢王) 또는 태조 성한왕(太祖 星漢王)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와 같은 고려 이후의 문헌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주로 비석과 금석문에서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로 나타납니다. 묘호는 태조이다. 세한(勢漢), 열한(熱漢)가 성한에 대한 이표기라는 설도 있다.

현재 전하는 신라시대의 묘비문과 금석문에 의하면 그는 문무왕과 김인문의 15대조, 흥덕왕의 24대조라 한다. 그밖에 신라 말기의 승려 진공과 진철의 묘비에도 그를 시조로 비정하고 있다. 조선후기의 서화가 추사 김정희는 성한 또는 세한이라 불리던 인물과 김알지를 동일인물로 추정하기도 하였다.

비석과 금석문에서의 기록

  1.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 (568년)**:
    – ..仰紹太祖之基纂承王..문무왕릉비문과 관련된 내용이 있으며, 신라 왕조의 기반을 확립한 인물로 묘사됩니다.
  2. 문무왕릉비 (682년)**:
    – 성한왕을 문무왕의 15대조로 서술하며, 하늘에서 태어난 신성한 존재로 묘사됩니다.
    1. 투후(秺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5행)
    2. 십오대조 성한왕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영혼이 선악(仙岳)에서 나와(6행)
    3. 개창하고 다스리며, 옥란(玉欄)을 대하였다. 비로소 조상의 복이 상서로운 수풀과 같고, 마치 석뉴(石紐)를 보고 금수레에 앉아
  3. 삼국사기 신덕왕 7년 4월 (687년)
    1. 대신(大臣)을 조묘(祖廟)에 보내 제사를 올리고 다음과 같이 고하였다. “왕 아무개는 머리를 조아려 두 번 절하고, 삼가 태조대왕(太祖大王)·진지대왕(眞智大王)·문흥대왕(文興大王)·태종대왕(太宗大王)·문무대왕(文武大王)의 영전(靈殿)에 아룁니다…. “
  4. 김인문 묘비 (690년)**:
    – 성한왕을 천년의 왕으로 표현하며, 김씨 왕조의 시조로 언급합니다.
    1. 太祖漢王은 천년의 ▨을 열고, ▨성(▨聖)은 백곡(百谷)의 ▨에 임하셨다.
  5. 흥덕왕릉비 (836년)**:
    – 흥덕왕을 성한의 24대손으로 명시하며, 성한을 김씨 왕조의 시조로 기록합니다.
    1. 太祖星漢 … 24代孫
  6. 광조사진철대사비 (937년)**:
    – 성한이 신라 김씨의 조상으로 등장하며, 김씨 왕조의 기원으로 설명됩니다.
    1. 金氏其先雞林人也. 考其國史實星漢之苗逺祖世道凌夷斯..
  7. 비로사진공대사보법탑비 (939년)**:
    – 성한의 선조가 신라로 내려왔다는 기록이 있으며, 김씨 왕조의 시조로 설명됩니다.
    1. 대사의 휘(諱)는 ▨운(▨運)이요, 속성은 김씨이니, 계림 사람이다. 그의 선조는 성한(聖韓)에서 강등하여 나물(𨚗勿)에서 일어났고, 근본에서 지말(枝末)까지 약 백세(百世)동안 가유(嘉猷)를 끼쳤다.

939년에 건립된 진공대사 보법탑비에 의하면 성한의 선조들은 어디선가 내려왔다는 뜻의 기선강자성한(其先降自聖韓)이라 하였다. 성한은 문무왕릉비, 김인문묘비명, 흥덕왕릉비, 진철대사탑비문(眞澈大師塔碑文),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 및 석관(原州 興法寺址 眞空大師塔 및 石棺) 등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비석과 금석문에 따르면, 성한은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 격으로 나타나며, 태조(太祖)라고 호칭되기도 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성한이 아닌 김알지를 김씨의 시조로 서술하고 있는 것과 달리, 금석문 속에서는 김알지가 등장하지 않고 성한을 김씨 왕실의 시조로 지칭한다. 신라 당대인들은 성한을 신라 김씨의 시조로 보았다. 이에 따라 성한의 정체에 대하여 많은 주장이 있어왔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 문헌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는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은 고려 이후에 편찬된 사료들이고, 삼국사기에는 세한, 삼국유사에는 열한으로 나타난다. 문무왕릉비문에는 성한을 태조(太祖)라 하고, 성한왕이 가계상 문무대왕의 15대조라 하며[3], 흥덕왕릉비문에도 성한을 태조라고 지칭하는 한편, 흥덕왕은 그의 24대손이라 하였다. 김인문의 묘비문에는 태조 한왕으로 나타난다.

신라김씨 선원세계도에 의하면 흥덕왕은 그의 21세손이다. 그런데 흥덕왕릉 묘비문에 의하면 흥덕왕은 성한의 24세손이다. 문무왕은 신라김씨 선원세계도나 삼국사기, 심국유사의 기록으로는 그의 15세손이고 문무왕릉비문에도 15세손으로 나타난다.

한편 경주김씨나 신라 김씨의 족보 및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미추왕편에는 세한 또는 성한의 최종 벼슬이 이찬이었다는 것만 간략하게 수록되어 있다. 미추 이사금이 아닌 그 4대조인 성한에게 태조라는 묘호를 추존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성한에 대한 다양한 가설

  1. 김알지와 동일인물**:
    – 김정희를 비롯한 일부 학자들은 성한왕과 김알지를 동일 인물로 보고 있습니다. 성(星) = “김(金)”, 한(漢) = “알<閼>”, 왕(王) = “지<智>”로 대응시켜, 성한왕과 김알지를 동일인물로 비정합니다.
  2. 세한(勢漢) 혹은 열한(熱漢)과 동일인물설**: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의 계보에서 문무왕의 15대조로 세한이 나타나는 점 등을 근거로 성한과 세한이 동일 인물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경주 김씨 세보에도 이러한 기록이 있으며, 성한이 세한 또는 열한으로 불렸다고 전해집니다.
  3. 미추왕(味鄒王) 동일인물설*:
    – 알지의 7세손으로, 신라 김씨 왕조의 최초 왕인 미추왕과 동일인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4. 탈해왕과 동일인물**:
    – 신라 석씨 왕조의 시조인 탈해왕과 동일인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5. 박혁거세와 동일인물**:
    –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와 동일인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6. 김일제의 후손설**:
    – 문무왕 비문에 따르면, 성한은 투후 김일제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성한이 김일제의 후손으로, 그들이 중국에서 신라로 이주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역사학계에서는 성한과 김일제를 관련시킨 기록은 신라 왕족의 관념적인 시조의식의 소산으로 보고 있다. 전근대에는 가계를 신성시하기 위해 고대의 전설적인 제왕 또는 유명한 위인들을 시조로 간주하는 일이 많았으므로, 김일제 후손설은 사실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분파

고려 말과 조선 시대로 접어들며 신라 김씨 일부 후손들이 신라 대보공 김알지를 시조로 하고 경주(慶州)를 본관으로 하여 분파했습니다. 그 중 태사공파 지파인 상촌공파가 가장 번창하였고, 그 다음에는 장군공파 지파인 계림군파, 벽상공신내사령공파의 지파인 수은공파 순입니다.

계보

알지(閼智) – 세한(勢漢) – 아도(阿道) – 수류(首留) – 욱보(郁甫) – 구도(仇道) – 말구(末仇) – 내물 마립간(17대, 奈勿 麻立干, 356년 ~ 402년) – 복호(卜好, 파호 갈문왕) – 습보(習寶) – 지증왕(智證王, 22대 마립간, 437년 ~ 514년) – 진종(眞宗) – 흠운(欽運) – 마차(摩次) – 법선(法宣) – 의관(義寬) – 위문(魏文) – 효양(孝讓) – 원성왕(元聖王) – 39대 소성왕 798년 ~ 56대 경순왕 ~ 935년

원성왕 (元聖王)

기본 정보

생애

원성왕은 신라의 제38대 군주로, 본명은 김경신이다. 신라 상대등으로 780년부터 785년까지 5년간 재임한 뒤, 785년 음력 1월에 왕위에 올랐다. 그의 재위 기간은 13년간 이어졌으며, 799년 2월 12일에 사망했다.

원성왕의 출생년도는 그의 증손자인 애장왕의 출생년도(788년)를 고려할 때 734년 전후로 추정된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최소한 60대 전후로 추측된다.

묘호와 시호

원성왕은 태조 성한왕, 태종 무열왕과 함께 신라 당대 기록에서 묘호가 확인되는 세 명의 임금 중 하나다.
신라 이후의 기록에서 묘호가 확인되는 것은 추존된 세조(世祖) 김알지 등 몇 명이 더 있으나, 신라 당시에 김알지를 세조로 추존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신라 멸망 후 수백년이 지나 작성된 《삼국사기》에서는 이 중 무열왕만이 태종이란 묘호가 기록되었다.
원성왕에게 ‘열조’라는 묘호를 올린 것을 알 수 있는 사료는 신라 당대의 기록인, 최치원이 비문을 작성한 초월산 <숭복사(崇福寺) 비문>에서 확인된다.

원성왕릉 (괘릉) 慶州 元聖王陵

  • 위치: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 사적 번호: 제26호

흥덕왕릉과 함께 하대 신라왕릉의 능원 양식이 잘 보존된 양대산맥이고 주변 정비도 잘 되었으며, 7번 국도(산업로) 변에 위치해 있어 교통이 좋은 편이다. 동해고속도로 남경주IC에서 진출하면 금방 도착할 수 있다. 그래서 경주 외곽의 신라왕릉 중에서는 가장 방문객이 많이 찾아오는 편이다.

경순왕릉을 제외한 신라 왕릉 중 유일하게 외동읍에 있는 왕릉이다. 신라 왕릉은 철저하게 서라벌, 즉 경주시 시내지구와 인근 안강읍에 있는데 유일하게 원성왕릉만 외동읍에 나와 있다.


원성대왕(元聖大王) 후손

원성대왕(元聖大王)의 후손 중 대광 김예, 그의 아들 삼한공신 삼중대광 김인윤, 그 아들 김신(순)웅을 중심으로 이어집니다.

예(禮)-인윤(仁允)-신웅(信雄)-인위(因謂)-원황(元晃)-경용(景庸)-인규(仁揆)-지우(之祐)-충언(忠彦)

“대왕(원성대왕)은 대광 김예를 낳고…….”
신라 원성대왕 후손 대광 김예
대광이라는 관직은 신라의 관직이 아니고 고려의 관직이다
그의 아들 삼한공신 삼중대광 김인윤
그 아들인 김신(순)웅

김순웅 (고려의 대장군)

  • 본관: 경주 김씨(慶州 金氏)
  • 이름: 순웅(順雄) 또는 신웅(信雄)
  • 조상: 신라 제38대 열조 원성왕
  • 조부: 김례(金禮) – 대광(大匡)
  • 아버지: 김인윤(金仁允) – 삼한공신 삼중대광(三韓功臣 三重大匡)
  • 아들: 김인위(金因渭) –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평장사 참지정사
  • 손자: 김원정도 평장사이며 문하시중까지 역임했습니다.
  • 김순웅 – 나무위키 (namu.wiki)

김순웅은 고려 초기의 무신으로 경주 김씨 계림군파의 파시조이다. 금석문에는 김신웅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경주 김씨 족보에는 김순웅으로 나와 있다. 아버지 김인윤은 삼한공신 삼중대광이라는 높은 관직을 지녔고, 김순웅은 호족/미래의 문벌귀족 가의 자제였다. 좌우위, 금오위, 천문위, 감문위 등 육위 장군을 거친 뒤 안서홀성주(황해도 병마사)를 지냈다. 태자태보 좌복야라는 명예직도 맡았다.

역사적 배경과 신빙성

《증보문헌비고》에는 김순웅이 경순왕의 후예라고 기록되었으나, 근현대에 발견된 묘지명(금석문)에는 김신웅(김순웅)의 조부인 대광 김례가 원성왕의 자식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두 인물이 시기상으로는 자식일 수 없으므로 조상-후손 관계로 해석된다.

장군공파

  • 파조: 김순웅(金順雄)
    • 고려 초 장군, 원성왕의 후예
    • 대표적 후손: 김균 (계림군파 파조)

김순웅의 아들 김인위는 대표적인 고려시대 문벌귀족으로 자리 잡았으며, 이후 1300년대에 계림군파 파시조인 김균 때 개경에서 조선의 수도 한양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이후 1600년대 김성진이 한양에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전북 임실 삼계면에 정착하였고, 이후 400여 년 넘게 여러 전란을 피하며 종족이 크게 번성하여 종가를 계속 이어왔다. 김성진의 아들인 김원중은 계림군파의 적장손으로 부친의 뜻에 따라 고향을 지키고, 둘째 김원립은 관직에 진출하여 그 후손들은 용인지역에 세거지를 형성하였다. 아울러 김균의 막내아들인 김계성의 후손들은 서울과 경기 지역에 세거지를 형성하며 크게 번성하였다.

  • 장군공파(將軍公派): 파조 김순웅(金順雄)
    • 9세 김남미(金南美)
      • 10세 김수(金粹)
        • 계림군파(鷄林君派): 13세 김균(金稛)

계림군파 (慶州金氏 鷄林君派)

경주 김씨 계림군파는 신라 태보공 김알지를 시조로 삼고, 조선 개국공신(開國功臣) 계림군(鷄林君) 김균(金稛)을 파조로 하는 경주 김씨의 한 분파입니다.

계림군파 최초의 족보는 1772년에 나왔으며, 이때부터 계림군파의 원시조는 고려시대 김순웅 장군으로 기록해 왔습니다.
다만, 김지우 묘지석의 등장으로 현재는 김순웅이 아니라 김신웅이 옳으며 이들이 원성왕의 후예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 금석문 검색 – 국가유산 지식이음 (nrich.go.kr)
  • 김지우 묘지명 (naver.com)
  • 경주김씨족보의 김인위(金因渭)와 김지우 묘지명..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 동 시기의 두 고려 묘지명의 충돌 문제 : 네이버 카페 (naver.com)
  • 경주김씨 태자파는 해체해야 한다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 김지우(고려) – 나무위키 (namu.wiki)
  • 족보조작이 많았던 18세기 말에 나온 <증보문헌비고>에는 경순왕의 후예라고 했으나, 당시는 김은열 묘지석이 등장한 후, 김씨 문중의 일부 사람들이 서로 자기들의 계대를 경순왕 후손으로 주장했고 이는 후에 계대가 맞지 않는 모순을 낳았습니다.
  • 1980년도에는 계림군파 족보에 이름을 바꾸며 입적한 사람이 이후 장군공파를 만들고, 김순웅을 경순왕의 첫째 손자라고 주장하기 위해 일제시대에 출간된 『신라삼성연원보』에 의거하여 태자파로 변경하고 김순웅을 마의태자의 아들로 바꾸면서 다른 신라계 김씨와 충돌을 야기했습니다.
  • ‘《신라삼성연원보》를 통해 보는 가짜 족보의 실상’이라는 기사를 쓴 김정현 역사전문가는 이 책을 성이 없던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너도 나도 족보를 꾸미며 만들던 일제시대의 위보로 판단했다. 다만 이미 조선 초부터 상민들까지 성을 가지고 있었고 조선 후기에 천민들의 면천도 활발히 이루어 졌으므로 일제 때 와서야 성씨를 갖게 되었다는 주장은 오류가 있다. 따라서 적당히 걸러들으면 된다.
  • 그러나 계림군파와 태자파 간의 소송에서 태자파가 승소하였는데, 이에 대해 신라김씨연합대종원 김진광 부총재도 “당시 법원이 역사적 진실에 대한 판단은 유보한 셈인데, 그렇더라도 족보는 역사에 근거해 기술돼야 한다”고 주장하며 태자파의 주장에 역사근거가 없음을 주장했다.

계림군파(鷄林君派)와 제숙공파(齊肅公派)

파조 김균(金稛)은 계림군파의 시조입니다. 계림군파 최초의 족보가 1772년에 나왔을 때 원시조는 김순웅(金順雄) 장군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김순웅은 신라 원성왕의 후예로 고려 초 장군을 역임했습니다.

장군공파 파조 김순웅의 손자 김원정의 10세손인 김균은 조선 개국공신(開國功臣) 보국숭록좌찬성에(輔國崇祿左贊成) 이르고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습니다. 사후 제숙공(齊肅公)의 시호가 내려졌습니다. 슬하에 아들 김맹성(金孟誠), 김중성(金仲誠), 김계성(金季誠) 3형제를 두었습니다.
김균의 묘는 경기도 광주시 능평동 산 89-1에 있으며, 사우(祠宅)은 전라북도 임실군 삼계면 후천리에 있습니다.

계림군 김균(金稛)

김균(金稛, ~ 1398)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친 중요한 인물로, 고려 왕조의 몰락과 조선 왕조의 개창에 큰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그는 고려 말기에 밀직부사의 벼슬에 있었고, 당시의 정치 상황을 분석하여 고려 왕조로는 국난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에 따라 그는 문하시중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흥 세력을 지지하여 새로운 왕조를 세우기로 결심했습니다.

조선 왕조 개국

1392년 (고려 공양왕 3년), 김균은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왕조를 개국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에 따라 그는 태조 이성계로부터 개국공신에 책봉되고, “계림군(鷄林君)”이라는 군호를 받았습니다. 그의 관계(官階:직급)는 정1품 보국숭록대부였고, 의정부 좌찬성의 관직에 임명되었습니다.

사후 시호와 군호

김균은 1398년(태조 7년)에 사망하였고, 태조는 그에게 “제숙공(齊肅公)”이라는 시호(諡號: 사후에 임금이 내리는 호) 내렸습니다. 사후 268년이 지난 1666년(현종7년), 조선 현종은 계림군(제숙공)의 군호를 올려 “계림부원군”으로 추봉하였습니다.

계림군파와 제숙공파

조선 시대 동안 김균의 후손들은 “계림군파”라기보다는 “제숙공파”로 더 많이 불렸습니다. 그 이유는 계림군이 생전의 호칭인 반면, 제숙공은 사후에 받은 시호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치대로라면 “제숙공파”라 불리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김씨 가문에서는 “계림군”이라는 호칭을 선호했습니다. 이는 “계림”이 “경주김씨”의 “김알지”시조가 태어난 곳이고 신라의 별칭이자 경주의 옛 이름이기 때문에 경주 김씨와 더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울산 最古 정자 관서정(觀逝亭), 헐렸다 경주김씨 문중 “보수 관리비 많이 들어 불가피했다” < 문화재 < 문화 < 뉴스 < 기사본문 – 울산매일 – 울산최초, 최고의 조간신문 (iusm.co.kr)

고조부는 울산 울주군 범서에서 참봉직 지내셨고

조부는 10대에 부산 내려오셔서 신발공장 운영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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